심재철(5선·안양 동안을) 의원이 9일 자유한국당의 20대 국회 마지막 원내대표로 선출된 후 내린 첫 결정은 ‘필리버스터 철회’였다. 전임 원내 사령탑이 지난 29일 199개 안건에 대해 신청한 필리버스터를 철회하는 대신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상정 연기를 얻어냈다.
심 원내대표의 이번 결정은 황교안 대표가 신임 원내대표의 자질로 강조한 ‘투쟁력과 협상력’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심 원내대표는 39년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에도 ‘투쟁보다 협상’을 내세운 전력이 있다. 1980년 5월 15일 신군부의 계엄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를 ‘서울역 회군’ 결정으로 끝낸 것이다. 당시 그는 대학 총학생회장단 대표를 맡고 있었다.
시위대 해산 이틀 후 신군부는 정권을 잡았고, 심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이해찬 복학생협의회장 등 주동자를 수배했다. 한 달이 넘는 도피 생활 끝에 6월 30일 체포된 심 당시 회장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83년 특별 복권된 심재철은 1985년 교편을 잡았지만 1년이 안 돼 MBC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재직 중 MBC 노동조합 설립을 주도해 1988년 초대 위원장을 지냈는데 그로 인해 또 한번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92년 방송 민주화를 요구하는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이듬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직장에 처음 복귀하는 날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심 원내대표는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
1995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심 원내대표는 16대 총선 때 현재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원내에 입성했다. 학생운동과 언론 민주화를 이끈 그가 탄압의 당사자인 공화·민주정의당의 후신 정당에서 국회의원이 된 사실에 많은 이들이 실망했다.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삶을 살게 된 심재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을 당시 당 전략기획위원장을, 세월호 참사 땐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장 등을 역임했다.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 부의장까지 지내는 영광도 누렸지만 지난 2013년에는 ‘국회 누드 사진 검색 사건’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는 학교 동기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서울의 봄 진실공방’을 벌이고 자유한국당 ‘릴레이 삭발’에 동참하며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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