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 대표이사 A씨는 회사 매출이 꾸준히 늘어나자 보험사 이외 분야로 투자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새로운 투자는 결과가 좋지 못했다. A씨는 주주이익을 침해한 배임죄로 법정에 섰지만 법원 판단은 무죄였다. 기업 이익을 위해 신중히 판단해 결정했다면 설사 기업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해도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무모한 결정이 아니라면 경영자 판단을 되도록 존중하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반영된 결과다.
A씨 사례는 한국 법원의 판단이 아니다. 독일 연방대법원이 2011년 독일 보험사 아락(ARAG)에 대해 내린 판결이다. 한국에선 비슷한 상황에 놓인 기업 총수가 경영에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하면 손해가 없어도 유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배임죄의 원조인 독일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이유가 뭘까.
세계 최초로 배임죄를 형사법전에 규정한 독일도 과거에는 ‘배임죄는 항상 통한다’는 원성이 높았다. 특별히 이익을 챙기지 않았어도 일단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죄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락 판결 이후 회사 경영의 특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배임죄는 점차 법전 속에만 있는 조항으로 변해가고 있다.
형법에 배임죄가 없는 미국과 프랑스에선 경영자의 재량이 폭넓게 인정된다. 일찍이 미국 루이지애나 대법원은 1982년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을 확립했다. 경영자가 기업 이익을 위해 성실하게 경영상 판단을 내렸고 공정한 절차에 따랐다면,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으로 드러나 기업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배상책임을 면하는 내용이다. 형사처벌이 필요한 때에는 경영자를 사기나 횡령, 절도, 금융재산 사기죄 등 다른 죄목으로 처벌한다. 프랑스 대법원도 1953년 그룹의 필요에 따라 계열사간 지원을 할 경우 범죄로 보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배임죄를 받아들였지만, 일본에는 현재 일반 배임죄는 법전에 남아있지만, 업무상 배임죄는 사라졌다. 1953년 한국에서 형법 제정 당시 업무상 배임죄를 포함한 일본의 형법 개정안을 그대로 수용했는데, 정작 일본에선 이 법안이 폐기된 것이다. 횡령과 배임죄를 같은 조문(형법 제355조 횡령ㆍ배임, 제356조 업무상 횡령ㆍ배임)에 규정한 우리나라와 달리, 별도 조문으로 분리한 것도 특징이다. 때문에 일본에선 횡령죄로 재판을 받을 때 우리나라처럼 배임죄가 따라붙는 일이 많지 않다.
최근 국내에서도 배임죄 유무를 판단할 때 경영판단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판결문에 명시된 적은 없지만, 경영상 필요가 인정되면 배임의 의도가 없다고 보는 판례가 점차 늘고 있다. 형사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과거에 비해 배임죄 판단 때 경영판단 원칙을 더 고려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정책자문위원을 지낸 최승재 변호사도 “법원이 경영을 속속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무죄를 주라는 취지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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