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유명 배우가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성범죄에 관대한 남성 우월적 시각이 반영된 솜방망이 양형이라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이처럼 최근 들어 법원의 형량을 둘러싼 논란이 SNS를 연일 달구고 있다.
형사재판은 유무죄를 판단하는 절차와 형량을 정하는 2단계 절차로 이루어진다. 양형(量刑)에서의 ‘양(量)’은 저울로 무게를 잰다는 뜻이다. 죄를 진 사람이 치러야 할 ‘죗값’의 무게를 재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가 한 손에 들고 있는 저울이 바로 죗값의 무게를 재는 저울인 것이다.
법관들에게 민사, 형사, 행정, 가사 등 여러 업무 중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형사재판이라고 답한다. 사람의 자유, 때로는 생명까지 박탈해야 하는 악역(?)을 수행해야 하니 어찌 부담이 아니 되겠는가. 유무죄 판단은 말할 것도 없고, 매사건 형량을 얼마로 할지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것이 너무나 힘겹다고 한다.
1974년 미국에서 판사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연방제2순회재판소(Second Circuit) 관할 구역 내 50명의 판사들에게 30개의 실제 사건 기록을 제시한 후 양형 의견을 받아 보았다. 그 결과 판사들 간 형량에 상당한 편차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례로, 은행강도 사건의 경우 최고 징역 18년에서부터 최저 징역 5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형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미국은 1987년 연방 양형기준법을 제정했다. 이 양형기준법은 범죄 유형별로 고려되어야 할 양형 인자를 추출해 판사들로 하여금 이를 준수하여 형량을 도출하도록 의무화했다. 미국의 양형기준법은 비록 2005년 판사의 양형 재량을 과도하게 제약한다는 이유로 위헌 판단을 받았지만 시행 이후 양형 편차가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법은 공동체의 가치관과 연동돼 있다. 양형도 마찬가지다. 양형의 트렌드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중요시하는 가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경의선 고양이 살해사건이 단적인 예다. 법원은 고양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람에게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1991년 동물보호법이 제정된 지 28년 만에 실형을 선고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에는 고작 물건으로만 인식됐던 고양이를 이제는 보호받아야 할 반려동물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있었기에 이런 양형이 가능해졌다. 최근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폭력에 대한 양형이 대폭 강화되는 현상도 모든 사람을 성별, 나이, 지위에 관계없이 자기결정권을 지닌 인격적이고 평등한 존재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의 확산과 상관관계가 깊다.
그런 차원에서 양형 과정에 공동체의 가치관을 투영하기 위해 형법 개정을 추진 중인 독일의 움직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 형법 제46조는 인종주의, 외국인혐오 등 인간에 대한 증오가 범행 동기인 경우 양형 가중 사유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 연방의회는 아예 반유대주의(Antisemitismus)를 독자적인 양형 가중 사유로 명시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독일인들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성과 참회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현해 나갈 공동체의 중대한 가치임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는 2007년 대법원 산하에 양형위원회를 만들어 현재 41개의 범죄군에 대한 양형 기준을 설정, 운영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앞으로도 사법부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양형 관행을 정착하고, 나아가 독일과 같이 공동체의 시대적 가치가 양형을 통해 구현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형사사법이 국민들로부터 진정한 신뢰를 획득하는 길일 것이다.
김희관 변호사ㆍ전 법무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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