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ㆍ종묘 해설 비영리민간단체 
 8개월 훈련 거친 전문해설사들 
 결혼 커플 11쌍ㆍ암 극복 사연도 
 10여년 무료 봉사 “보람차다” 
8일 덕수궁에서 만난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집이 소속 자원봉사자 권혁준(왼쪽부터), 김혜자, 강현미, 이철호씨가 중화전을 가리키고 있다. 오대근 기자

“원래 창덕궁을 주로 해설하는데 독일인 관광객이 오면 정동과 덕수궁을 함께 소개합니다. 하인리히 친왕(프로이센 빌헬름 2세 동생)이 이곳을 방문한 공식 기록이 있고, 옆에 독일 대사관도 있어서요. 조선 개항기부터 독일과의 인연을 함께 소개하는 거죠.”

8일 서울 덕수궁에서 만난 문화해설사 권혁준(50)씨는 “사업차 바이어에게 서울 관광을 시켜주다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싶어 궁궐 해설사 교육을 받고 4년째 활동 중”이라고 말했다. 권씨가 소속된 시민단체는 1999년 결성된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이하 궁궐길라잡이)’. 조선 5대 궁궐과 종묘를 설명하는 전문 해설사를 양성, 활동하게 하는 비영리민간단체로 이날 창립 20년을 맞았다. 3개월(100시간) 동안 교육 받고, 5개월 수습을 거쳐야 활동할 수 있는 까다로운 조건에도 권씨 같은 해설사가 450명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규모가 커지면서 마음 맞는 궁궐길라잡이들끼리 별도 모임도 만들었다. 권씨는 “기본적인 해설교육을 받지만 관광객에게 궁을 소개하는 방식은 해설사마다 다르다. 잘하는 요령을 공유하고 싶어 궁궐사랑방 모임과 영어공부 모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동시통역대학원에서 한국어-독일어 통역을 전공했던 그는 종종 외국인 관광객에게 영어와 독일어로 창덕궁을 소개한다.

체력과 지식, 감정노동을 필요로 하는 활동이지만 궁궐길라잡이들이 받는 돈은 없다. 오히려 회비를 내면서 단체를 운영한다. 수습 전 100시간 해설 교육을 받을 때도 30만원의 교육비를 낸다. 회원 스스로 ‘완전한 자원봉사’라는 생각에 자부심이 크다. 소속 해설사 다섯명 중 한 명이 은퇴자일 정도로 중장년 활동가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최고령 현역 궁궐길라잡이인 김혜자(71)씨는 “고등학교 양호교사로 일하다 명예퇴직했다. 그 후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어느 순간 허무해졌고 보람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외국 여행할 때 머리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명소에서 해설사 봉사활동 하는 걸 보고 감명 받았어요. ‘저렇게 교양 있게 나이들 수 있구나’하고. 그때는 우리나라에는 그런 분이 안 계셨거든요.” 1년간 국내 문화유산 답사를 다닌 김씨는 2004년 서울역사박물관 도슨트 봉사활동을 하다 그 해 겨울부터 궁궐길라잡이 교육을 받고 15년째 활동 중이다. 그는 “한겨울 경복궁을 돌아다니며 해설하다 보면 입이 얼어 말이 안 나올 때가 있다”면서도 “두 시간 내내 설명을 들으며 따라오는 분들이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2005년부터 3년간 15차례에 걸쳐 사할린 동포 방문단에게 경복궁을 소개했을 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이었다. 향원정 연못가에서 청일전쟁 후 기울어진 한반도 정세를 설명할 때면 김씨도 방문단도 눈물을 훔쳤다. “제가 사는 동안 가장 잘한 일이 이 봉사활동 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15년 활동하는 동안 무릎 인공관절 수술, 암수술을 했는데 궁궐해설하고 싶어서 어떻게든지 회복하려고 노력했고, 살아가는 힘이 됐습니다. 이 단체가 자랑스럽고 저도 자랑스럽습니다.”

서울 5대 궁궐과 종묘를 관람객에게 해설하는 '궁궐길라잡이' 이철호(왼쪽부터), 강현미, 김혜자, 권혁준 씨. 오대근기자

‘궁궐길라잡이’ 활동을 통해 결혼에 골인한 커플도 열한쌍이나 된다. 각각 2007년, 2016년부터 궁궐길라잡이로 활동한 이철호(36), 강현미(30)씨는 작년 10월 결혼했다. 해설사 100시간 교육 후 봉사활동을 할 궁궐을 직접 고를 수 있는데, 두 사람은 “서울 5대 궁궐 중에 가장 20세기와 가까운 곳이라 공감이 많이 간다”며 덕수궁을 골랐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시간도 많아졌다. “교육생일 때 경운궁(덕수궁) 해설사로 남편을 본 적 있어요. 그때는 ‘저런 봉사자도 있구나’하는 생각뿐이었는데, 경운궁을 배정받고 수습할 때 행사 회식하면서 다시 만났죠.”(강현미) 수습기간 만난 강씨의 멘토가 이날 남편 이씨를 강씨 옆 자리에 앉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강씨는 “역사에 대한 관심, 가치관이 비슷했다. 세상에 고정된 게 없고, 같은 사건도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생각이 저랑 같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가치관이 비슷하지만 해설 스타일은 정 반대다. 제가 유머를 많이 섞는 반면에 아내는 진지한 편이다”라며 “요즘도 서로 어떤 장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어떤 관람객을 만났는지 얘기 나누는 시간이 많다”고 덧붙였다.

해설 2년차인 강씨는 “봉사활동이 끝날 때면 제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기분을 받는다. 그게 다음 해설하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13년째 해설사로 활동 중인 이씨는 이전과 사뭇 달라진 관람객들의 태도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는 “관람객들이 10년전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설명을 노트에 적고 질문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라도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창립 20주년을 맞았다니 뿌듯하고 기분 좋습니다. 오래 활동하며 같이 발전하고 싶어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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