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여성운동가 캐서린 매키넌 미시간대 로스쿨 종신교수 방한
“피해자가 ‘노(No)’를 했다고 증언해도, 여성의 ‘아니오’ 가 진짜인지 의심하고 검증하려 하는 현실에선 강간죄 구성요건에 ‘동의’가 포함되어도 개선될 게 없습니다.”
미국의 대표적 여성인권운동가이자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찰 특별젠더자문관인 캐서린 매키넌(73) 미시간대 로스쿨 교수는 지난 7일 서울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강간죄 구성요건에 ‘동의’만 포함돼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법연수원 국제콘퍼런스 연사로 초청돼 한국을 방문한 매키넌 교수는 1970년대에 성희롱이 사적 사건이 아닌 구조적 성차별임을 논증하며 그 법적 개념을 처음 정립한 학자다.
매키넌 교수의 주장은 강간죄를 정의하는 개정 형법에 성폭력의 원인인 권력 불평등까지 반영돼야 한다는 의미다. 전국 200여개 여성인권단체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는 올해 초부터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ㆍ협박’에서 이와 더불어 ‘동의’ 여부를 추가하는 내용으로 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매키넌 교수는 “권력 불균형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동의’만으로 강간 여부를 판단한 영국의 경우는 신고사건 중 5.7%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꼬집었다. 눈에 보이는 의사표시로만 죄를 판단하는 데서 나아가 성별ㆍ빈곤ㆍ계급 등 강간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형태의 불평등을 법에 포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법원이 고(故) 구하라씨를 불법촬영한 전 남자친구 최종범씨의 성폭력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것에 대해서도 매키넌 교수는 “피해자는 온몸으로 ‘동의하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이라며 애도했다. 지난 8월 서울중앙지법의 1심 판결 당시 판사는 “피해자로부터 명시적 동의는 받지 않았지만 피해자 의사에 반한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매키넌 교수는 이에 대해 “여성이 성적 착취를 즐기고 동의할 것이라고 보는 잘못된 전제가 왜곡된 판결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매키넌 교수는 나아가 “폭력을 동반한 성적 행동을 생물학적 특성으로 정당화하는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발생한 ‘성남 5세 아동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매키넌 교수는 “5세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라며 “피해 아동은 물론 가해아동에 대해서도 성적 학대가 없었는지 철저히 조사하고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확산된 미투(#Me Too) 운동의 성과로는 피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분위기가 자리잡은 점을 꼽았다. 할리우드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수 십 년 전 범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 받게 된 것이 그 예다. 사회 각 조직이 법에 호소하기 전부터 성폭력에 대한 자정 노력을 하게 된 것도 중요한 변화라고 설명했다. 매키넌 교수는 “과거엔 직장ㆍ학교에서 성폭력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조직을 떠났지만, 이제는 조직이 먼저 나서 가해자를 징계하려 한다”며 “‘성폭력은 범죄’라는 규범이 미투운동을 계기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