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기자

저는 장애가 있는 어머니의 부양 문제가 고민이에요. 아버지는 10년 전 위암으로 돌아가셨고, 경제 능력이 없는 어머니를 대신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 15년간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요. 매달 월급의 3분의 1을 어머니께 드리고 있어요. 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결혼을 준비 중인 여동생도 있지만, 동생은 본인이 내킬 때에만 엄마에게 용돈을 주고, 최근에는 결혼 준비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어머니께 잘할수록 어머니는 제게만 의지하고, 동생은 더 소홀해지는 거예요. 저와 동생은 어머니와 따로 떨어져서 다 따로 사는데, 저는 한 달에 2,3번씩 어머니를 찾지만 동생은 1년에 2,3번 정도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카드 빚 문제, 자신의 병원 문제, 집안의 대소사를 무조건 제게 얘기하고 힘들다고 하세요.

동생에게는 내색조차 않으십니다. 결혼하는 동생에게 1,000만원을 선뜻 주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따로 모은 것인지, 제가 드렸던 생활비의 일부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주는 자식 따로 있고, 받는 자식 따로 있다고 생각이 들어 어머니와 동생 둘 다 모두 얄밉고, 서운했던 감정이 폭발할 지경이에요. 어머니께 따지듯 물어보니 어머니는 되려 ‘동생은 돈 쓸 데가 많다’고 감쌉니다. 내년에 제가 원룸 생활을 끝내고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갈 계획이라고 하니 본인도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얘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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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로서 받은 건 하나도 없는데, 왜 저만 부양의 의무와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집은 아버지의 음주와 폭행, 폭언으로 불행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매일 같은 옷만 입고 학교에 갔고, 도시락에 항상 김치 반찬만 있었습니다. 대학도 정말 가고 싶었는데, 형편상 취업을 했습니다. 친구들이 수능을 볼 때 저는 펑펑 울었던 기억이 선명해요. 그런 일들이 아직도 저를 갉아먹습니다.

지금 제 상황은 나아진 게 없어요. 어머니 부양 문제는 저의 발목을 잡고 있어요. 평생 그 짐을 혼자 떠맡아야 하는 게 너무 두렵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어머니 부양 문제로 결혼이나 연애는 제게 사치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이런 저보다는 본인 노후만 걱정하십니다. 제가 뭘 사려고만 하면 ‘돈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쓰느냐’며 타박하세요.

저는 이런 상황을 무조건 참아야 할까요. 도망치고 싶다가도 어머니에 대한 측은함 때문에 다시 제자리입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어머니나 집안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진경(가명ㆍ34세ㆍ회사원)

진경씨,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보다 사랑은 훨씬 더 표현의 형태가 다양하고, 마음의 깊이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예전보다 남자친구를 볼 때 덜 떨리는 데 사랑이 식은 게 아닐까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그분은 더 이상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제가 ‘그분을 신뢰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그분이 ‘네’라고 답하면 저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분을 사랑하는 거예요. 신뢰도 깊은 사랑입니다’라고 해요. 애기 엄마들이 ‘애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요. 책임감 때문에 기르는 것 같아요’라고 하기도 하지요. 책임감 때문에 기르는 것 같다고 하는 것도 사랑이에요.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이 쉽게 규정해놓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사랑이 마치 집에 오면 생각나고, 뭘 해도 좋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고 헌신적인 사랑도 많습니다.

사랑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쓴 것은 당신이 어머니를 돌봐왔던 그 책임감 역시 굉장히 깊은 사랑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입니다. 너무 큰 책임감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거예요. 그 책임감이 무거워 마치 굴레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가족은 사랑을 기본으로 하는 관계인데 사랑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가족이 벗어나고 싶은 굴레처럼 느껴지는 그 괴로움을 누가 제대로 알아줄까요. 누가 대신 덜어줄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익숙해서 어깨가 무거워진 책임감은 사랑이 아닌 것 같지만, 다른 형태의 사랑이지요. 만약에 당신이 어머니를 돌보지 않으면, 당신은 오히려 불편하고, 괴로울 거예요. 생활비를 보태지 않고 어머니를 외면한다고 당신이 행복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왜 나만 이렇게 어머니를 책임져야 해’라는 생각이 들어 억울할겁니다. 그 억울함은 어머니를 돌봐서 억울한 게 아니라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동생 때문일 거에요. 진경씨 동생은 어머니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자신의 인생만 신경 쓰는 동생이 얄미운 거예요. 동생이 잘한 건 아니지만, 동생의 행동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지만 동생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인생과 배우자와의 미래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것만 챙기는 동생이 야박하겠지만, 동생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 자신과 배우자를 우선순위에 두는 게 맞습니다. 물론 동생은 자신의 시간과 돈, 마음을 어머니께 할애하는 면에서 지나치게 인색하고 어머니나 언니는 동생의 우선순위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동생이 진경씨만큼 어머니라는 무게를 느끼지 않는 것이 분명히 서운하고, 섭섭하다 못해 부아가 치밀 거예요. 자기 인생을 찾아가는 동생이 부럽기도 하고, 그렇게 결정하지 못하는 당신이 어리석고 억울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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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신의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진경씨, 당신이 어머니를 위해 행한 매 순간의 결정은 잘한 거에요. 참 잘 하셨어요.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건 간에 당시에 월급을 어머니께 드리고, 어머니를 찾아뵌 그런 결정은 당신에게 최선이었을 거예요. 참 잘한 일이에요. 당신은 지난 15년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정했기 때문에 당신이 어머니를 돌본 것도 잘 한 일이에요. 막연한 후회와 억울한 마음이 들어도 참 잘하셨어요. 진경씨뿐 아니라 그 당시 최선을 다했을 뿐 딱히 잘못한 결정이 아님에도 막연한 후회와 괴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참 잘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그 책임감이 굴레처럼 느껴졌겠지만 그 역시 깊은 사랑이고, 어머니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당신을 위한 면도 있었을 테니 억울해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내린 결정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매우 잘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진경씨, 참 잘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머니를 돌보는 게 너무나 힘들겠지만, 지금처럼 유지하는 게 당신의 마음을 제일 편하게 할 거에요. 어머니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고 나머지는 당신의 생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가는 것이 당신의 마음이 가장 편한 일일 거에요. 하지만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돌보지만 그로 인한 책임감 때문에 숨 막힐 때 숨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의식주를 같이 하면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어야 하고,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히기 때문에 당신이 숨쉴 수 있는 틈마저 없어질 수 있어요. 그러면 당신의 삶은 우울해지고, 마음은 더 힘들어질 거예요.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야 할 테지만, 같이 사는 것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생과 제부에게도 어머니의 부양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의논해야 해요. 다만 ‘너 얼마 낼 거야? 어머니 어떻게 할거야?’라고 물어보면 안 되고, ‘돈의 액수가 얼마든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허심탄회하게 ‘내가 너한테 섭섭한 것은 돈을 내고, 안 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를 책임지라는 것도 아니고, 네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머니를 너무 배려하지 않고, 비중을 두지 않아서인데,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언니로서 동생 입장을 잘 다독이면서 얘기한다면 당신의 마음이 훨씬 편안해질 거예요. 동생이 단돈 5만원이라도 생활비에 보태서 마음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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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머니를 생각해보면 저는 ‘얼마나 딸에게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울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동생에게 결혼자금을 주고 더 챙기는 것은 어머니가 동생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당신만큼 편하고 믿음직스럽지는 않기 때문이에요. 당신을 너무 믿고 의지하면서도 정작 당신에게 표현을 이상하게 합니다.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데, 미안하면 괜히 화를 내거나, 엉뚱한 핀잔을 주는 사람들처럼요. 어머니가 돈을 아껴 쓰라고 하는 것은 ‘돈을 아껴서 내 노후 자금을 대라’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는 데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 표현하는 걸 거예요. 어머니가 당신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이지만, 아예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로 미안해서 그런 걸 거예요.

진경씨,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당신이 어머니를 돌본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고, 저는 당신의 그런 결정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제까지 언제나 최선의 결정을 했듯이 앞으로도 어떤 상황이 생기면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을 거에요. 그러니 미리 어떻게 될까 봐 지레 걱정하거나, 힘들어하지 말고 부딪히고, 이겨나가기를 응원합니다. 이성 상대를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도망갈 분이라면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낫지요. 미래를 함께 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당신의 상황을 말하고, 이해받고, 함께 하면 됩니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말이지요.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적절하고 합당하게 잘 처리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삶을 잘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해나갈 거예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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