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성의 3대 주택지로 꼽히는 후암동(아이자와주택ㆍ왼쪽부터), 장충동(에지아주택), 금화장(에가시라주택)에 있는 주택들은 경사 지붕에 모르타르로 4면을 마감하고, 2층으로 지은 서양식 주택이었다. 출처=잡지 ‘조선과 건축’

언젠가부터 집은 재산 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투기 대상이 돼 버렸다. 서울의 동네들은 지역적 특징 대신 땅값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고, 사람들은 거주지에 따라 소득, 문화, 교육의 수준이 재단됐다. 대형 건설사 광고에서조차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고 노골적으로 떠들었다. 삶을 담는 그릇이어야 할 집이 투기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흔히 1970년대 강남 개발로 땅값이 크게 오르면서 집에 대한 인식이 뒤바뀌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경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부교수가 쓴 ‘경성의 주택지’는 그 기원을 100년 전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부터 봐야 한다고 제시한다.

조선시대만 해도 한양의 인구는 20만명 내외로 유지돼왔다. 하지만 1920년대 갑자기 25만명이 되고, 1940년대에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인구 급증으로 주택난이 심해지자, 주택 개발업자가 등장했고, 대규모 필지를 사들여 이를 불특정 다수에게 분양하는 주택 공급 방식이 나타났다. 이 같은 분위기에 당시 일제의 영향과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을 흡수하면서 집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한옥 밀집 지역이었던 가회동과 북촌 등에는 조선인 상류층들이 동경했던 서양식 주택들이 대규모로 지어졌다. 경사 지붕에 사면을 모두 모르타르로 마감하고, 입구를 강조한 2층 주택이 전형적인 서양식 주택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남향이고, 시내에 가까웠던 후암동에 밀집했다. 후암동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재해석된 서양식 주택(문화주택)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빈민촌이었던 신당동에는 새롭게 성장한 일본 중류계층이 일본에서 들어온 ‘전원주택’을 지었다.

놀랍게도 100년 전 경성의 상황은 오늘날 서울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구 증가로 주택 개발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개발회사들이 분양 팸플릿을 배포해 홍보하며, 모델하우스를 공개해 유행을 선도했던 100년 전의 모습은 오늘날 서울 곳곳에서 재개발 중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연상케 한다. 원주민들이 쫓겨날 수밖에 없는 현실조차 빼닮았다. 신당동 개발 당시 원주민이었던 토막민들은 생활 터전을 박탈당한 채 인근의 미개발 구릉지로 밀려났다. 토막촌과 고급 주택지의 극명한 대조는 오늘날 강남의 고급 주택 타워팰리스와 판자촌인 구룡마을의 모습과 판박이다.

 경성의 주택지 
 이경아 지음 
 집 발행ㆍ392쪽ㆍ2만3,000원 

일제강점기 주택 개발 양상을 물리적으로 훑는 것 외에 책은 주택지를 개발했던 주체들과 원주민, 주택을 설계한 건축가, 실제 그 주택에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상세히 소개해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당시 상황을 재현한다. 민족운동가이자 건축가였던 정세권은 기존 한옥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중정식이 아닌 모든 방을 가운데로 모은, 중당식 구조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룡은 일제가 세운 문화주택을 비판하며 주택 개량 운동을 펼쳤다.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된 온돌 방식을 바꾸려는 실험적인 방법들도 강구됐다.

저자는 “책에 언급된 동네들 대부분은 아쉽게도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철거 위기에 처해 있다”라며 “책을 통해 서울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경성의 도시적ㆍ건축적 변화를 이해하는 한편, 해당 지역에 쌓인 시간의 켜와 장소의 가치가 재발견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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