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진짜 깡패 섭외했나" 리얼리즘 연기파 배우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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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진짜 깡패 섭외했나" 리얼리즘 연기파 배우 신호탄이었다

입력
2019.12.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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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송강호의 등장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송강호는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이준익 김지운 감독 등 한국 대표 감독과 일하며 흥행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성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자 입시 면접을 보러 온 청년은 “가장 존경하는 배우가 누구인가”라는 교수의 질문에 대뜸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아, 홍금보...” 연기를 하고자 뜻은 품었으나 막상 배우에 대해 아는바 없었던 그는 며칠 전 영화에서 본 배우 이름을 별 생각 없이 말했고 아니나 다를까 떨어지고 말았다. 시험에서 두 번 낙방의 고배를 마신 청년은 삼수를 하려니 “아, 이게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경상대학 방송연예학과로 진학해 사물놀이와 마당극을 접했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집안형편이 나빠져 학업을 그만두고 말았다. 3개월간 막노동 일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모은 24세 청년은 부산 지역극단에 입단하고서야 기나긴 연기자 인생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무렵 송강호(52)가 오늘날과 같은 대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송강호는 경남 김해군 가락면(현재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에서 태어나 김해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는 ‘김해군’에서 자랐는데 시골에서 자란 것이 연기의 밑거름이 된 듯하다. 서민적인 분위기, 정겨운 인물들을 연출하는 것이 아무래도 수월하다.”(영화주간지 씨네 21 113호, 1997년 8월 5일) 중학교 2학년 무렵 친구들 앞에서 다른 사람 흉내를 내거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면서 연기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됐지만, 영화를 접할 극장도 없었던 성장 환경에서 배우가 되는 길을 찾기는 어려웠다.

송강호(오른쪽)가 처음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영화 '초록물고기'.
송강호는 영화 '넘버3'에서 '무대뽀 정' '헝그리 정신' 등 유행어를 만들어 내며 일약 스타로 발돋음한다.

◇배우 송강호 만든 연우무대

부산 한 극단에 몸담고 있을 때인 1990년 겨울, 유명 극단 연우무대가 부산 무대에 올린 연극 ‘최선생’을 본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어떤’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관객에게 보여줄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송강호는 전교조에 관한 이야기임을 바로 드러내지 않고도 관객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연우극단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연극에 매료되었다.

“당시 큰 화두였던 민주와 사회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기는 그대로 극에 반영되어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느냐 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중략) 연우무대는 내가 지향하던 점을 정확히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연은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집어준 기회이자 새로운 용기와 목표를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송강호 ‘연우무대는 내가 연기하는 힘’, 책 ‘연우 30년: 창작극 개발의 여정’에서)

훗날 ‘살인의 추억’(2003)에서 용의자 중 한 명으로 단역 출연하는 연우극단 극장장 류태호는 막무가내로 찾아와 “청소부라도 시켜 달라”며 입단을 희망했던 송강호를 보며 곤란해했다고 한다. 송강호는 포기하지 않고 연우극단을 네 차례나 방문해 얼굴을 알렸고, 연출가 이상우를 만나서 단원으로 받아들여진다. 1991년 연우무대가 준비하던 ‘한국 현대연극의 재발견’이라는 옴니버스 연극 중 단막극 ‘동승’의 노인 역이 입단 후 송강호의 첫 배역이었다. 공연에 포함된 다른 작품인 ‘박첨지’에도 내정된 배우가 빠지게 되자 빈자리를 대신 메웠다. 그 뒤 5년 동안 송강호는 ‘날아라 새들아’ ‘국물 있사옵니다’ ‘지젤’ ‘심수일과 이순애’ 등을 공연하며 연극계에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 시기 송강호는 동갑내기였던 김윤석을 ‘형’이라 부르며 자취방에서 동거동락하고 지냈다. 이런 인연은 한동안 연극계를 떠나있던 김윤석이 배우 활동을 재개하고 영화계로 들어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엔 정말 연극 밖에 몰랐어요. 영화는 불현듯 갑작스레 다가온 거예요.”(영화월간지 키노 2002년 1월호) 영화 현장도 경험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대학로에서 죽어라 연극만 파던 송강호에게 연우극단의 선배였던 김의성은 자신이 주연을 하는 ‘어떤 영화’에 단역을 맡길 요청했다. 한 달 후면 결혼이라 급전이 절실했던 송강호는 사나흘 정도만 촬영하면 200만원을 준다는 제안과 한 두 마디 정도 대사가 담긴 2장짜리 분량의 대본 일부를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었다. 송강호는 주인공의 동창인 속물 사업가 역으로 등장했지만 별다른 이목을 끌진 못했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1997)에선 노숙인 역할의 엑스트라로 잠깐 얼굴을 내밀 뿐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송강호에게 영화란 잠깐의 외도이자 아르바이트에 지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꼽는 진정한 영화배우 데뷔는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초록물고기’(1997)로 이뤄지게 된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에서 송강호는 직장상사에게 시달리는 소심한 은행원을 연기한다.
영화 '반칙왕'의 송강호.

◇명대사로 남은 ‘넘버3’

이창동 감독은 연극 ‘비언소’에서 선보인 송강호의 연기에 주목해 ‘초록물고기’의 깡패 판수 역으로 낙점했다. 한석규, 심혜진, 문성근 등 당대의 쟁쟁한 배우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이 감독은 송강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연극계의 스승이었던 연출가 이상우도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해보라” 응원하며 송강호를 공연일정에서 빼주었다. 격려에 힘입은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실로 가공할 만한 리얼리즘 연기를 펼쳤는데, 개봉 당시 관객들은 “어디 진짜로 깡패를 섭외해서 찍은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송강호의 이름 석자를 대중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시킨 건 송능한 감독의 ‘넘버 3’(1997)였다. ‘초록물고기’의 촬영 도중 한석규의 배려로 그와 같은 소속사에 들어가게 된 송강호는 이 작품에도 연이어 동반 출연하게 되었는데, “라면 먹고 뛴 현정화“를 운운하며 무대뽀 정신과 헝그리 정신을 열변하는 깡패 조필의 대사는 당대의 유행어를 넘어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명대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배역을 고사한 차인표를 대신해 ‘쉬리’(1999)의 특수요원 이장길 역으로 투입되었을 때 미스캐스팅이라는 평을 듣는 등, ‘코미디 배우’라는 고정관념은 한동안 그의 발목을 잡았다.

본격적인 송강호의 첫 주연작은 ‘조용한 가족’(1998)을 같이 한 김지운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반칙왕’(2000)이었다. 직장 상사가 걸어오는 공포의 헤드락을 풀기 위해 레슬링 도장을 다니는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 역이었는데, 이때 그의 연기는 김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감독의 의도를 실현’(김지운 저 ‘김지운의 숏컷’)하는 것이었다. 배역에 임하는 송강호의 태도는 실로 비장했다. 프로레슬러들이 쓰는 고난이도의 테크닉까지 익히기 위해 훈련에 온몸으로 달려들었는데, 촬영을 마친 뒤 숙소에서 샤워를 하면서 온몸에 시퍼렇게 든 멍을 보고는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적 감정을 담아낸 ‘반칙왕’에서의 연기변신으로 송강호는 기존에 자신에게 덧씌워진 틀을 깨는데 성공했다.

“송강호는 (사람들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뛰어난 코미디언이 아니라, 뛰어난 배우입니다. 그의 독창적인 인물해석, 예측불허의 변화무쌍한 연기는 한국영화사에서 독보적인 것입니다.”(‘키노’와의 서면 인터뷰, 책 ‘박찬욱의 몽타주’)

송강호는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인물 송우석을 연기했다. NEW 제공
송강호의 최근작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최고상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CJ ENM 제공

◇21세기 충무로 간판이 되다

송강호의 잠재성을 꿰뚫어 본 또 한 명의 인물은 박찬욱 감독이었다. 박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진중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오경필 중사 역을 맡긴데 이어, 하드보일드를 표방한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는 죽은 딸의 복수에 나서는 냉혹한 중소기업체 사장 박동진 역으로 기용했다. 송강호는 상반된 성격의 두 배역을 본인의 인상을 유지하는 가운데, 톤을 달리하며 자기화하는 특유의 연기 수법으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감독의 의도를 넘어서 작품을 살려내는 송강호의 능력은 ‘살인의 추억’(2003)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 예로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덧붙이면서 영화의 느낌을 살리는 송강호의 센스에 감탄한 봉 감독은 엔딩의 터널 장면을 촬영하기 전, 여관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기막힌 대사‘를 주문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송강호가 고안해낸 대사가 바로 “밥은 먹고 다니냐?”였다.

동시대 배우인 한석규와 최민식은 표현주의 연기의 전통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송강호는 감정의 분출과 기교를 절제함으로써 복잡다단한 뉘앙스를 끌어내는 미니멀리즘 연기를 추구했고, 한국영화 연기의 경향이 바뀌어가는 전환의 중심에 서있었다. ‘밀양’(2007)과 ‘박쥐’(2009)를 거쳐 ‘변호인’(2013)과 ‘기생충’(2019)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송강호는 한국영화의 21세기를 자신의 시대로 만들어나갔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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