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사회계몽적 메시지…IMF 이후 위로 전해
서울 광화문 광장을 거닐어 보셨나요? 무엇이 가장 눈에 띄었나요? 근엄한 이순신ㆍ세종대왕 동상을 감상하고 나면 그 옆으로 시선이 닿는 공간이 있습니다. 서울 세종대로 교보생명 빌딩 외벽의 광화문 글판입니다. 바쁘게 오가는 시민들을 사색에 빠지게 하는 마음 속 휴식처 같은 곳이죠.
2일 오전 광화문 광장이 한층 따뜻해졌습니다. 광화문 글판이 새로운 문구로 단장을 했거든요. 이번 겨울편 문구는 일제강점기에 쓰여진 윤동주 시인의 ‘호주머니’란 시에서 발췌했습니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호주머니 속 두 주먹 불끈 쥐며 힘내라는 위로가 애달프면서도 정답게 느껴집니다.
광화문 글판은 교보생명 본사 외벽에 걸리는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글판이에요. 1991년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설치돼 1년에 4번, 계절감과 시의성을 담은 글귀들이 소개되죠. 29년째가 되면서 광화문 글판은 명실공히 광화문 광장의 명물로 자리잡았어요.
1991년 1월 처음 걸린 글귀는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였습니다. 이후 ‘훌륭한 결과는/ 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1994), ‘나라경제 부흥시켜/ 가족행복 이룩하자’(1997) 등 경제성장을 향한 사회계몽적 메시지가 주를 이뤘죠.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 여름에는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는 글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주로 직설적이고 중압적인 표현이 많았어요.
IMF를 거치면서 글판은 국민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고은 ‘길’ㆍ2000) ‘먼동 트는 새벽빛/ 고운 물살로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김용택 ‘섬진강 11ㆍ2003) 등 문학 작품에서 따온 서정적 문구가 나왔죠. 2000년 문안선정위원회가 신설되면서 시민의 참여와 투표로 문구를 선정하게 됐습니다.
색다른 시도도 이뤄졌어요. 2010년 힙합 가수의 노래 가사가 글판 문구로 선정됐습니다. ‘너와 난 각자의 화분에서 살아가지만/ 햇빛은 함께 맞는다는 것.’ 가수 키비의 힙합곡 ‘자취일기’의 내용입니다. 인간은 각자 고독하게 살아가지만, 언제든 서로 소통의 공간에 나와 기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지금껏 시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글귀는 무엇일까요? 2015년 교보생명이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나태주 시인 ‘풀꽃’의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가 1위에 꼽혔습니다. 총 2,310명 중 1,493표를 받았어요.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2월 설 인사로 이 문구를 응용하기도 했죠.
내년이면 글판도 서른 살이 됩니다. 다음엔 어떤 메시지로 우리에게 말을 걸까요. 바쁘시더라도, 퇴근길 잠시 숨을 돌리고 그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글판의 위로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l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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