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우연히 남자, 여자의 가면을 쓴 것
가면 벗으면 모두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
각자의 빙의 증상 깨닫고 극복해 나가야”
조남주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사람의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옮겨 붙는 것을 빙의라고 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지영이 산후 우울증으로 인해 빙의 증상을 보인다. 빙의의 특징은 빙의 증상 동안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빙의 증상을 핑계로 지영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 작가는 왜 굳이 빙의라는 증상을 사용했을까.

접신한 무당이나 특별한 환자만이 아니라 대부분 인간은 일종의 유사 빙의 증세를 보이며 살아간다. 지영이 빙의 증세를 보인 첫 장면은 명절을 마치고 서둘러 시댁을 떠나려다 그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타난다. 짐을 챙겨 나오려는 순간 시누이 가족이 들이닥친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얼른 밥상을 내오라고 한다. 딸이 부엌으로 가려고 하자 시댁에서 얼마나 고생했겠느냐며 앉아 있으라고 한다. 그때 지영이 “안사돈, 댁의 딸이 귀하면 남의 딸도 귀한 줄도 아셔야죠.”라고 정색을 하며 시어머니를 쏘아붙인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들어서는 순간 딸이 시댁에서 고생했던 것을 너무나 안쓰럽게 여기는 가슴 따스한 친정어머니가 된다. 그러다가도 며느리를 바라보는 순간 다시 며느리가 못마땅한 차가운 시어머니로 돌변해 며느리에게 밥상을 내오라고 한다.

명절에 시댁에 서둘러 가자고 이야기하는 남편에게 왜 당신이 하지 못한 효도를 남의 딸인 나에게 시키려 하냐며 퍼붓고 싶은 것은 며느리 마음이다. 그러나 친정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네 올케가 아직도 오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그런 여자가 있냐며 올케가 미워지는 것은 딸 마음이다. 이처럼 며느리와 딸로의 빙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가면을 바꿔 쓰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한 여성의 안에는 가정 내의 역할만 해도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안사돈, 올케, 시누이, 딸, 엄마, 부인 등등 다양한 가면(페르소나)이 들어 있다.

영화에서 지영의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값비싼 선물을 주고 보약을 보내는 무한 사랑의 가면을 쓰고 대하고 딸에게는 값싼 선물을 주며 아프다고 해도 보약은 지어줄 생각도 안하는 무관심한 짠돌이 가면을 쓰고 대한다. 우리가 쓰는 가면들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가면이 우리 얼굴에 쓰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우리 인간 대부분이 앓고 있는 유사 빙의 증상이다.

영화에서는 특히 여성 간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왜 가정 내의 여성들은 다양한 가면을 쓰고 서로 갈등하는 것일까. 여자는 며느리 가면을 쓰면 시댁에서 밥상을 준비하는 존재가 되고, 딸 가면을 쓰면 친정에서 밥상을 받는 존재로 역할이 크게 바뀐다. 그러나 여자와 달리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남자는 강자이고 지배자이다 보니 가면에 따른 역할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남자는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바깥사돈, 처남, 아빠, 남편 등등 그 어느 가면에도 명절에 손님을 위해 음식을 만들거나 밥상을 내오는 역할은 없었다. 가져오는 음식을 먹으면 되고,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생색을 낼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러다보니 가면 변화에 따른 갈등이 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남자의 경우에도 이미 아들일 때와 남편일 때 부엌에서의 역할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남자들은 가정에서 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여성과 남성 모두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까.

“지영아, 네가 아파”라고 지영의 남편이 지영에게 이야기하듯이 작가는 우리 인간에게 “사람아, 당신이 아파요”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지영이처럼 우리도 앓고 있는 유사 빙의 증상을 돌아보며 치유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연히 남자 혹은 여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 그 가면을 벗으면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우리가 앓고 있는 유사 빙의 증상을 깨닫고 이를 이겨내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가리라 믿는다.

박남기 전 광주교대 총장ㆍ대한교육법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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