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부모 간곡한 호소와 여론에 밀려
폐회 닥쳐 어린이생명안전법안 국회 심의
법안처리 막는 야당의 국회 무력화 안돼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 대책 당정 협의에 태호군 어머니 이소현씨와 해인양 어머니 고은미씨가 아이들 영정을 들고 회의를 지켜보고 있다. 뉴스1

지난 27일 오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실 앞에서는 남녀 몇몇이 복도를 지나가려는 행안위 법안소위 위원장 이채익 자유한국당 의원 앞에 무릎 꿇고 눈물로 법안소위 개최를 애원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 사진을 품에 안은 부모들이 민식이법 등 어린이생명안전법안으로 불리는 법안들의 심사를 촉구한 것이다.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비통함을 안고 정치인 앞에서 무릎 꿇는 부모 모습이 낯설지 않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반 년여 뒤 세월호 유가족인 창현 아빠는 대통령 시정연설을 본 뒤 떠나는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특별법 제정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며 길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듬해 2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실을 찾아간 세월호 유가족들도 무릎 꿇고 유승민 대표에게 진상 규명을 부탁했다.

대의제는 전문성을 갖춘 선출직 대표에게 정치의 권한을 일임하지만 작동 과정에서 국민의 의지와 동떨어진 결과로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일을 왕왕 겪는다. 국민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를 두고 보다 못해 주권자가 나서서 거꾸로 대리인들에게 읍소하는 이런 광경이야말로 대의제의 결함을 웅변하듯 보여 준다.

해인이법(어린이안전관리법 개정안)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린이집을 나서던 다섯 살 해인이가 비탈길에 주차했다 미끄러져 내려온 차에 치여 크게 다친 뒤 응급조치마저 늦어 숨지자 만들어졌다. 13세 미만의 어린이 응급환자는 즉시 의료기관에 이송하고 이 사실을 신고하도록 한 법이 국회에서 방치되는 사이 1년여 만에 비슷한 사고가 났다. 서울랜드 주차장에서 굴러 내려온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 네 살 하준이의 비극을 되풀이 말자고 만든 하준이법(주차장법 개정안)은 경사지 주차 때 미끄럼주의 안내표지판과 고임목 비치를 의무화한다.

한음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은 2016년 특수학교 통학차량 안에서 숨진 여덟 살 한음이의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버스 안 CCTV 설치, 운전자 등 안전교육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민식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은 학교 인근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아홉 살 민식이의 비극을 막자고 스쿨존 내 신호등, 과속단속 카메라 설치 등을 의무로 했다. 축구클럽 차량 사고로 숨진 여덟 살 태호ㆍ유찬이 사고 이후 어린이 탑승 차량은 모두 유치원 등 통학차량과 같은 정도의 안전규정을 지키도록 한 태호ㆍ유찬이법(체육시설 설치ㆍ이용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이 5개 법안은 정부나 지자체 예산이 들고 일부 사업자들과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어린이 안전 강화를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이구동성인 나라에서 이 법안들은 길게는 3년 7개월 동안 해당 상임위 한 편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패스트트랙 법안들처럼 정당 간의 이해가 엇갈려 다투기라도 했다면 다행이다. 각 정당의 관심 법안에 밀려 늘 후순위였고, 무엇보다 툭하면 의사일정 보이콧을 외치는 제1 야당의 국회 무력화 시도 탓이 크다.

20대 국회 폐회를 열흘 남짓 앞두고 부랴부랴 법안소위, 상임위에서 이 법안들을 심사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하지만 지난 22일 민식이법이 행안위 법안 심사를 10분 만에 통과한 것은 이런 국회의 부작위가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인지 실감케 한다.

최근까지 20대 국회의 법안 처리 실적은 31% 정도로 역대 최저라는 19대(41.7%)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한다. 뒤늦게라도 본회의 법안 상정ㆍ의결을 서둘러야 할 판에 자유한국당은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 들었다.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를 다시 무력화시키겠다는 뜻이다.

선거법 개정과 검찰개혁 법안 저지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최근 단식 이유이기도 했지만 공감을 얻지 못했다. 선거법 개정을 두고는 찬반 여론이 엇갈리나 검경수사권 조정이나 공수처 설치는 찬성이 변함없이 우세하다. 자유한국당은 민의에 등 돌리는 것으로는 모자라 기어이 국민의 무릎이라도 꿇리려는 속셈인지 묻고 싶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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