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보수 정치계의 정신적 지주이자 전후 정치사의 산 증인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가 29일 별세했다. 향년 101세.
교도(共同)통신과 NHK 등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나카소네 전 총리는 이날 29일 오전 7시 넘어 도쿄(東京) 시내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일본 국내 정치에선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세워 약 5년(1,806일) 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국철 민영화 등 재무ㆍ행정 개혁을 추진했고, 외교에선 냉전 체제에서의 미일동맹을 강조하면서 한국과 중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1918년 5월 27일 군마(群馬)현에서 태어난 고인은 도쿄대 법대 졸업 후 내무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해 종전 직후인 1947년 28세에 중의원 의원으로 첫 당선됐다. 이후 20회 연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하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남겼다.
1959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입각한 이후 방위청 장관, 통산장관, 자민당 간사장과 총무회장 등을 역임하고 1982년 11월 제71대 총리를 맡아 73대까지 연속 재임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ㆍ1918~1993) 전 총리가 이끄는 다나카(田中)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총리에 오른 직후엔 ‘다나카소네(다나카+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다나카 전 총리가 1983년 록히드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 거리를 뒀다. 민간 부문의 활력을 중시하는 ‘작은 정부’ 노선을 앞세워 국철, 전매, 전신전화 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외교에선 냉전 체제 하에서 서방진영의 일원임을 명확하게 내세움으로써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론ㆍ야스’ 관계(서로 론과 야스로 부를 정도로 미일 정상 사이가 좋았음을 의미)를 구축하는 등 미일동맹 강화에 주력했다. 소련의 위협 증대를 이유로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참여했고 방위비가 국민총생산(GNP) 대비 1%를 돌파했다.
한국과 한국 정치인들과의 관계도 각별했다. 고인은 1960년대 초반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막후 특사 자격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위해 일본에 체류하던 때 그와 인연을 맺으며 양국 국교에 역할을 했다.
고인은 총리 취임 후 첫 공식 방문지로 한국을 찾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시 한국어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른 일화도 유명하다. 일본 총리로서는 첫 한국 방문이었으며, 당시 경제협력자금 지원을 결정하는 등 한일 우호증진에도 기여했다.
이에 앞서 1976년 한일 의원연맹의 초대 회장이었던 김종필(JPㆍ1926~2018) 전 국무총리 등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지난해 6월 JP 영결식에는 아들인 나카소네 히로부미(中曾根弘文) 참의원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조사를 대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을 이끈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했다. 일본 정치인들에게 야스쿠니신사 참배의 길을 열어준 것으로써 한국, 중국 등 주변국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렀다. 그는 이후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다.
1994년 일본이 전후 50주년을 앞두고 전쟁범죄에 관한 사죄 결의를 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했고, 정치 입문 이후 전후 정치 총결산을 내걸고 평화헌법 개정 등을 주장하는 등 우경화를 앞장서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1937∼2006) 총리 시절엔 지역구를 반납하면서 종신 비례대표 1번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2003년 11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중의원 비례대표 73세 정년제’를 내세우며 사실상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56년 간의 의원생활을 접고 은퇴를 선언했다. 정계 은퇴 이후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목표로 초당파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단체의 회장을 맡는 등 내정과 외교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계속해 왔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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