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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공부 더 하세요” 흥행감독 배창호 변신시킨 여중생의 한마디

입력
2019.11.30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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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한국의 스필버그’서 예술가로 거듭난 배창호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배창호 감독은 젊은 감각으로 무장한 영화들을 선보이며 1980년대 충무로 최고 흥행술사로 떠오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창호 감독은 젊은 감각으로 무장한 영화들을 선보이며 1980년대 충무로 최고 흥행술사로 떠오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꼬방동네 사람들’(1982)로 입봉했을 무렵, 배창호(66) 감독은 약관 29세의 야심찬 청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하나님, 절 꼭 영화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가 하면, 이만희 감독의 ‘돌아보지 마라’(1963)에서 본 장동휘의 연기를 곱씹으며 돌아다니곤 했던 조숙한 영화광은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 조감독으로 충무로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선배였고 원작자이자 각본가로 협업하게 되는 소설가 최인호가 이 감독을 만나도록 주선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연출을 쉬고 있었던 이 감독은 ‘말쑥한 양복 차림에 007 가방’을 들고 나타난 배 감독을 보고 처음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온 줄 알고 긴장했다고 한다. 배 감독은 문제의 007 가방에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꺼내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두터운 인연이 싹트게 된다. 아프리카 케냐의 종합상사 지사장으로 발령나며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음에도, 이 감독이 연출 활동을 재개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배 감독은 미련 없이 직장을 접고 돌아와 영화계에 투신했다.

 ◇검열 서슬 퍼렇던 시절 무삭제로 개봉 

1982년 개봉한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던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기회가 배창호 감독 손에 쥐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2년 개봉한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던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기회가 배창호 감독 손에 쥐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바람불어 좋은 날’(1980)과 ‘어둠의 자식들’(1981)로 이 감독이 재기의 발판을 다지면서, 조감독 배창호에게도 연출의 기회가 오게 된다. ‘어둠의 자식들’의 조감독으로 일할 때 친밀한 사이였던 원작자 이동철 작가는 다른 영화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베스트셀러 ‘꼬방동네 사람들’의 영화화 판권을 배 감독에게 넘겼다. 문공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시나리오 사전 검열과 프린트 검열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시나리오는 다섯 번이나 반려됐고, 제목을 ‘검은 장갑’으로 바꾸라는 단서를 주고 60군데 가량을 수정하라는 압력이 가해지는 등, 검열 당국과 마찰을 빚었지만 승부사 기질이 농후했던 배 감독은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극장 표값이 1,500원이던 시절, 예산 8,000만원을 초과해 3,000만원을 더 끌어오면서 “겁 없이 ‘벤허’(1959) 찍냐”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배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기 광명시 철산동의 빈민가에서 촬영한 영화는 신파적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 한국사회 밑바닥의 처절한 현실을 담고 있었고, 가위질을 준비하던 검열위원들까지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며 무삭제 개봉에 성공한다.

 ◇‘고래사냥’, 당대 흥행기록 갈아치워 

영화 ‘고래사냥’은 배창호에게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별칭을 안겼다. 이 영화의 주연 안성기(맨 왼쪽부터), 이미숙, 김수철.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고래사냥’은 배창호에게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별칭을 안겼다. 이 영화의 주연 안성기(맨 왼쪽부터), 이미숙, 김수철.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 감독은 대중 관객의 호흡을 읽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스토리텔러였다. 현대그룹 홍보영화 ‘철인들’(1982)은 외화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영화였지만 산업현장에서 부딪치는 위기의 극복을 이복형제 간의 갈등 해소와 맞물리게 해 극적 감흥을 이끌어냈고, 배우 장미희와의 첫 작업이 된 ‘적도의 꽃’(1983)에선 히치콕의 ‘이창’(1954)을 떠올리게 하는 스릴러적 심리 묘사에 섹스, 액션 등 상업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고루 버무린 능란한 화술을 선보여 서울 관객 15만5,000명을 불러모았다. 한국 로드무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고래사냥’(1984)은 백치로 살 수밖에 없었던 소시민의 심정을 피안을 찾아 떠나는 일행의 낭만주의적 여정에 투영시키며 서울 관객 42만6,000명이라는 대박을 기록한다. 이때부터 배 감독에겐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사랑의 좌절을 그린 ‘깊고 푸른 밤’(1985)은 한국 영화 또한 여건이 따라준다면 할리우드 못잖은 웰메이드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역작이다. 명보극장에서만 49만명, 코리아극장까지 합쳐 60만명이 넘는 관객수를 끌어모았다. 이는 김호선의 ‘겨울여자’(1977)가 세운 당시 한국 영화 흥행 최고 기록 58만명을 경신한 것이었다.

‘적도의 꽃’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을 잇달아 히트시킨 배 감독의 앞길엔 거칠 것이 없었다. 최인호 원작과 각본에 배 감독이 메가폰을 쥐고 안성기 주연이면 성공한다는 것이 흥행의 필승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고래사냥 2’(1985)를 기점으로 배 감독의 경력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대의 하이틴 스타 강수연과 손창민이 합류했고 안성기가 슈퍼마켓에서 산낙지를 먹는 장면 정도가 명장면으로 회자되었던 ‘고래사냥 2’는 여주인공을 성매매 여성에서 소매치기로, 실어증을 기억상실증으로 설정만 바꿨을 뿐, 플롯은 전작과 다를 게 없는 구태의연한 복제판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그 작품에 대해서는 배창호 감독이나 저나 모두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관객을 지나치게 내려다본 잘못을 저질렀어요.”(안성기 발언, 영화전문지 로드쇼 1989년 7월호) 영화가 한창 상영 중이던 때, 배 감독에게 어떤 여중생이 다가와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감독님, 이제 공부 더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이날 배 감독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만취한 채로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타성에 젖으려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시 한번 영화감독으로서의 초심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황진이’로 일대 전환 “쿠데타” 

1986년 개봉한 장미희 주연의 ‘황진이’는 에로물일 거라는 주변의 예상을 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6년 개봉한 장미희 주연의 ‘황진이’는 에로물일 거라는 주변의 예상을 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해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초청하는 영시네마 부문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게 된 배 감독은 세계 각지에서 출품된 다양한 작품들을 일일이 챙겨 보면서 결심하게 된다. “두고 보아라. 나도 너희들 못지않은 세계적 수준의 영화를 만들 것이다.” 배 감독의 차기작은 ‘황진이’(1986)로 결정되었다.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읽고 영화화를 꿈꾼 건 1983년부터였지만 제작비가 많이 드는 사극의 특성상 미뤄두고 있던 기획이었다. 검증된 흥행 감독 배창호가 칼을 뽑자 제작비는 금세 충당되었고 당시 최고급 기기였던 HMI 조명에 파나비전 35㎜ 카메라를 동원할 만큼 화려한 진용을 자랑했다. 마침 선배인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1985)이 39만 관객이라는 대박을 터뜨린 직후였기에 ‘한국의 스필버그’ 배 감독이 만드는 사극 에로물은 어떨지, 장미희의 나신을 볼 수 있을지 여부를 두고 관객의 기대가 고조되고 있었다.

배 감독은 이러한 주변의 기대와 선입견을 철저히 저버렸다. 최 작가의 초고에는 드라마틱하고 탐미적이며 자극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배 감독은 각본을 수정하면서 도리어 그런 부분들을 덜어내는 데 열심이었다. “썼던 양념을 빼자. 그냥 밋밋하게 생수처럼 만들어보자.” 탈고될 즈음에 ‘황진이’는 방랑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세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구도(求道)의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황진이 역을 맡은 장미희, 정일성 촬영감독을 비롯한 관계자 대다수가 영화의 방향성을 납득하지 못했다. 1986년 9월 18일 명보극장과 동아극장에서 걸린 ‘황진이’의 흥행세는 전회 매진으로 나흘 만에 4만명이 들었을 만큼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와 감독을 성토하는 관객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동아극장에서는 롱테이크(오래 찍기) 장면을 참다 못한 관객이 영사실에 올라와서 “영사기 잘못 돌린 것 아니냐” “영화가 왜 이렇게 느리냐”고 항의하거나, 감독에게 직접 “당신, 이 따위 재미없는 영화를 만드는 법이 어디 있어!”라고 따지는 일까지 있을 만큼 관객들은 급작스러운 배 감독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때 ‘황진이’를 호평한 정영일 영화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배창호 감독이 한국영화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쿠데타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다.”

 ◇배창호의 소신 “영화는 마음을 위해 존재” 

‘황진이’는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야 했지만, 배창호 감독의 차기작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예술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이 영화의 주연인 황신혜(왼쪽)와 안성기. 한국일보 자료사진
‘황진이’는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야 했지만, 배창호 감독의 차기작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예술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이 영화의 주연인 황신혜(왼쪽)와 안성기. 한국일보 자료사진

추석 대목을 노렸던 영화는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내렸고 흥행도 8만9,000명에 그쳤다. 그러나 ‘황진이’는 배창호가 예술가로 거듭남을 알리는, 재탄생의 신호탄이었다. ‘영화는 마음의 양식’이며 ‘육체를 위해서 밥을 먹듯이 예술이란 것은 마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란 소신을 굳히게 된 배 감독은 현실 속 서민들의 삶에 대한 관찰과 동화적 서정성, 기교의 과잉을 덜어내고 보다 유려해진 연출 감각으로 멜로드라마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을 만들게 된다. 제작자였던 이태원 태흥영화 대표는 이 영화가 실패할 것이라 장담했다. “폭력과 섹스, 이게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건데, 이게 또 다가 아닌 거야. 나도 이장호 데리고 ‘무릎과 무릎 사이’나 ‘어우동’ 했잖아. 그거 하면서 섹스영화에 눈떴어요. 그런데 그 뒤에 배창호하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찍는데, 감독이 섹스는커녕 키스도 안 시키는 거야. 내가 야, 제발 포옹이라도 한 번 넣자고 그랬는데 절대 말을 안 듣는 거야. 그래서 ‘이래가지고 손님 절대 안 든다’고 소리지르고 나와 버렸어.”(이태원 발언, 김영진 저 ‘이장호 VS 배창호’)

그러나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단성사에 걸리자마자 매진 행렬이 잇따랐고 결과적으로 관객 19만 2,000명의 흥행을 거두었다. 다음 작품인 ‘안녕하세요 하나님’(1988)은 후기 배 감독의 변모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고래사냥’의 플롯을 따르지만 바탕에 깔린 주제 의식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닿아 있었다. 1980년대 한국 상업영화의 최전선에 섰던 흥행감독 배창호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면서, 진중한 작가적 탐색의 여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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