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의 작은 떨림으로 수많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배우였다. 도화지처럼 말간 얼굴에는 세상의 빛과 어둠이 투명하게 스몄다. 이런 원석을 창작자들이 놓칠 리 없다. 2011년 독립영화 ‘혜화, 동’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이후,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2012)와 ‘용의자’(2013), SBS 드라마 ‘맛있는 인생’(2012), tvN ‘아홉수 소년’(2014), MBC ‘한번 더 해피엔딩’(2016) 등에서 꾸준하게 연기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사라졌다.
배우 유다인(35)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건 ‘올레’(2016) 이후 3년 만이다. 다음달 12일 개봉하는 새 영화 ‘속물들’로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28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마주한 유다인은 “한동안 방황을 했다”며 생긋 웃었다. 방황이라니, 뜻밖이다. 신작에 관한 궁금증에 앞서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간힘 쓰면서 버티다가 지쳐 버렸던 것 같아요.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왜 안 될까’라며 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촬영장이 무서웠고 사람들을 피했죠. 돌이켜보면 ‘혜화, 동’을 만나기 전에도 그랬어요. 제 의지와 상관없이 1년간 쉬었죠. 이번에도 저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속물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유다인은 “너무나 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렇게 각별하게 느껴지는 작품은 ‘혜화, 동’ 이후 오랜만이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 유다인은 타인의 그림을 표절한 작품을 ‘차용 미술’이란 말로 포장해서 파는 미술작가 선우정을 연기한다. 실력도 재능도 없지만 예술계 금수저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며 때론 거래와 속임수도 서슴지 않는 속물이다. 유다인은 “선우정이 예전 내 모습 같아서 감정 이입이 많이 됐다”며 “현장에서 아주 신나게 연기했다”고 말했다.
특별전을 앞둔 선우정 앞에 고교 동창 탁소영(옥자연)이 나타나고, 애인 김형중(심희섭)과 큐레이터 서진호(송재림)가 서로 다른 의도를 갖고 얽히면서 이야기는 예측불허 블랙코미디로 흐른다. 예술계의 부조리와 인간의 속물근성이 까발려지는 결말은 2007년 신정아 사건과 대기업 일가의 미술품 탈세 사건 등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곤경에 빠진 선우정이 가식을 벗고 뻔뻔한 민낯을 드러내는 장면에선 쾌감과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가장 기대했던 촬영이에요.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도 했고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선 제가 스스로 싫어하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었던 지질한 표정이 나오더라고요(웃음).”
이전 출연작과는 연기의 결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기본기가 탄탄해서 변주가 능란하다. 특유의 생활감도 여전하다. “예전에는 캐릭터를 캐릭터로서 대하지 않고, 저 자신을 빗대서 바라봤어요. ‘내가 이런 역을 어떻게 하지’라며 지레 겁먹었던 거예요. 이번에 새로운 캐릭터를 하면서 자신감이 확 붙었어요.” 어느 때보다 의욕도 넘친다. “연기도 잘해야겠지만 영화를 관객에게 널리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유다인은 확실히 단단해졌다. 또 다시 흔들린다 해도 부러지진 않을 듯하다.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지켜야 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백 마디 조언을 듣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중요해요. 이젠 두렵지 않아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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