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라는 숨겨진 차원
언덕이 드문 도쿄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은데, 이 도시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던 15년 전에는 좁은 길에서 마주치는 자전거가 참 거슬리는 존재였다. 마주 오는 자전거가 어디까지 다가왔을 때에 피해야 안전할까. 어느 쪽으로 피해야 보행자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전거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다. 자전거가 언제쯤 방향을 틀 것인지 예상할 수 있고, 어떻게 몸을 피해야 위험하지 않은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전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이 사실을 문득 깨닫고, 도쿄에 꽤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미디어와 네트워크 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이지만, 일본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이 생겼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저서 <숨겨진 차원>(1966년)에서 공간을 해석하는 방식이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문화권에서는 자기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 행동이 “화났다”라는 의미를 뜻한다. 좋은 친구라면 “왜 화가 났어?”라고 말을 걸고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어떤 문화권에서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이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이다. 닫힌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거는 친구가 있다면, 눈치가 없고 귀찮다고 느껴질 뿐이다.
공간을 감지하는 방식의 차이는 공공장소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에 옆 사람과 어느 정도 떨어져 서는가, 주문 카운터에 줄을 설 때 앞 사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가 등의 미묘한 감각이 문화에 따라 다르다. 외국의 거리를 걷다가 의도치 않게 자주 타인과 몸을 부딪힌 적이 없는가. 처음 가본 도시의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타인과의 낯선 거리감에 불쾌하게 느낀 적이 없는가. 홀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이런 경험이 공간 인지와 관련한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공간을 읽는 방식이 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행위 자체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안경알이 푸른색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이 푸르스름하다고 믿기 쉬운 것이다. 홀이 이 책에 <숨겨진 차원>이라는 묘한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문화는 무의식 속에 각인된 일종의 틀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모든 종류의 문화가 숨겨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밥그릇을 밥상에 놓은 채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 예의 바른 태도이다.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것은 점잖지 않은 행동이고 심지어는 “거지들이나 하는 태도”라고 경멸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반대로 밥그릇을 가슴 높이로 들어올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먹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밥그릇 쪽으로 몸을 숙이는 것은 “개가 먹이를 먹는 자세”와 비슷해서 천하다고 보는 것이다.
의식주와 관련한 습관이나 예의범절, 전통적인 관혼상제 의례 등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때로는 너무 적나라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이런 사례를 들어 한국과 일본이 문화적으로 ‘다르다’, 또는 ‘같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다.
문제는 이웃나라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판이한 예의범절이 정착되었던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금은 두 나라의 인적 교류와 정보 교환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 이후 양국을 오가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교적 갈등이 불거질수록 정보 수요는 폭발한다. 한국에서 법무부 장관이 사표를 냈다는 뉴스 속보를 일본의 웹 사이트에서 먼저 읽고, 일본 정치인의 부정부패에 대한 특종이 실시간으로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 등장한다. 정치나 외교에 관한 정보는 왜곡되기도 하지만, 연예인, 관광지, 음식 등에 대한 정보는 현지보다 빠르고 정확한 경우도 많다. 적어도 정보의 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 두 나라의 교류는 역사상 최고 수준을 찍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단순하게 서로의 이해를 증진하는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나 외교 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의견 대립의 배후에는, 정보 부족으로 인한 ‘무지’보다는, 과잉 정보로 인한 ‘오해’ 혹은 고의적 정보 조작에 의한 ‘편향’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보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차원에서 이해와 왜곡, 해석과 성찰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무시한 채, 문화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홀이 숨겨진 문화를 역설하던 1960년대에는 텔레비전이라는 ‘뉴 미디어’가 세상 천지를 바꿀 듯 일상 속으로 밀고 들어오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홀과 학문적으로 교류하면서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은 학자가 바로 마셜 맥루한이다.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지구촌이 도래한다” 등 기상천외했던 그의 주장이 인터넷 시대에 두고 두고 회자되는 것을 보면, 깊은 통찰력은 엉뚱함에서 온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사상가이다.
홀과 맥루한은 십 수년 동안 백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술적으로 교류했다. 맥루한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1964년)은 상당 부분 홀의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그는 몇 차례에 걸쳐 학문적 영감을 준 홀에게 감사를 표했다. 예를 들어,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확장”이라는 그의 유명한 문장은 1950년대에 발간된 홀의 저서에서 먼저 언급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맥루한이 홀의 생각을 ‘표절’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문화인류학자와의 교류 속에서 독자적인 미디어관을 발전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독창적인 업적이다.
두 거물 학자가 진솔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각각 탐구했던 ‘문화’와 ‘미디어’라는 키워드가 닮은꼴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역할과 특징은 다르지만 둘 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틀로서 작용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관여하면서도, 투명한 안경알처럼 자꾸 잊혀지고 가리워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구를 촘촘히 감싼 네트워크 미디어의 시대에 문화를 탐구하는 것은, 몇 겹으로 ‘숨겨진 차원’을 살살 들추어내는 것처럼 섬세한 작업이다. 대체로 흥미진진하지만 때로는 까다롭다. 개인의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문화적 차원을 드러내는 것, 인터넷이라는 렌즈로 재구성되는 세계를 객관화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역시 그 중에서도 난이도가 가장 높은 부분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자기 성찰하는 것이다.
격주 연재물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일본 문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네트워크 미디어의 시대에 대한 해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문화가 어떤 얼굴로,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다. 미디어 인류학자가 안내하는 이 길에 독자들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김경화ㆍ일본 칸다외국어대 준교수
김경화 교수는 미디어 인류학자로 일본에 거주하며 인터넷 및 네트워크 문화를 연구 중이다. 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후 한국일보 기자와 포털 사이트 Daum의 사업전략 담당, 도쿄대 조교수를 거쳐 칸다외국어대 국제커뮤니케이션학과 준교수로 일하고 있다. 한국어 저서는 <세상을 바꾼 미디어>, <21세기 데모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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