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임기 반환점을 돈 문재인 대통령이 TV로 생중계된 국민과의 대화를 가졌다. 주권자인 국민을 직접 만난 건 좋았으나, 야당을 포용해 남은 2년 반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가겠다는 비전은 보이지 않았다. 가령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나 선거제 개혁은 대통령의 의지가 없다면 시작할 엄두도 못 내거나 밀어붙일 각오를 할 수 없는 전형적인 대통령 의제다. 하지만 국민과의 대화에선 문 대통령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국민과의 대화 형식이 허술하고 진행이 산만했다는 걸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부터 문 대통령을 가까이서 봤다는 한 여권 인사는 “문 대통령이 화끈하게 속을 터놓고 얘기한다는 인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원래 경청은 잘 해도 소통에 능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별명이 ‘고구마’다. 진지하지만 답답한 느낌도 있다는 의미다. 전임 대통령의 불통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웬만해선 주변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적폐청산이 시대적 과제였던 임기 전반에는 과묵하더라도 강단과 원칙 있는 모습이 필요했다. 하지만 임기 후반은 다르다. 5년 단임제 하에서 임기 3년 차는 권력의 달이 기울기 시작하고 청와대 안에 갇혀 민심과도 멀어지는 때다. 한 여당 의원이 들려준 얘기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여민관에서 본관 집무실로 걸어가는 데 15분이 걸린다. 그렇게 본관에 올라가도 집무실까지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지나야 하고, 집무실 문을 열면 대통령이 앉아 있는 책상까지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20여분 지나면 처음에 ‘안 된다’고 진언하겠다던 마음가짐은 온데간데 없고, 대통령 심기만 살피게 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좌우 정권을 가리지 않는다. 임기 후반에는 반대 편 목소리까지 두루 들어야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이라도 연동형 비례대표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처럼 도입이 절실한 정책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서야 한다. 국정의 무한 책임은 대통령이 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중 45회 개최했던 기자회견을 문 대통령이 2년 반 동안 겨우 세 번 했다는 건 곱씹어볼 대목이다.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조국 사태를 계기로 여야 불문하고 정치권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논의가 분출하는 건 문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불통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는 경고다. 공교롭게 문 대통령이 기대고 있는 진보 진영도 ‘배타성으로 인한 소통 부족’ 진단을 받은 상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본보 인터뷰에서 조국 사태를 복기하며 “잘못된 판단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그런 메시지를 내는 메신저를 공격해 무력화시키다 보니 반성 자체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가 됐다”고 진보 진영을 질타했다.
결국 5년 단임제 대통령의 실패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의회 정치를 복원하고 대통령이 진영을 넘어서 직접 여야 정치권과 소통하는 수밖에 없다. ‘베트남전 확전’이라는 실책이 있지만, 내치에선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드는 미국의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이 참고할 만한 사례다. 그는 시간만 나면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의원님(Mr. Senator), 식사나 하시죠’라며 약속을 잡곤 해 ‘미스터 새너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의회와의 소통이 성공의 시금석이라는 얘기다.
사실 답은 문 대통령도 알고 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세계나 신념체계만 고집하면 될지 몰라도, 정치를 통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나라를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각오라면 전체를 다 통합하는 태도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문재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 남은 건 실천으로 옮기느냐다. 마침 제1야당 대표가 선거제에 반대하며 청와대 앞에서 일주일째 단식 농성 중이다. 대통령의 선택이 궁금하다.
김영화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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