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균형] 양심이 따뜻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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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균형] 양심이 따뜻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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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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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에 서식하는 라쿤. 외형은 너구리와 비슷하여 많은 사람들이 혼동한다.
겨울털로 갈아입은 너구리

붉은 가을을 즐기기엔 삶이 조금 고달팠나 봅니다. 출장 가는 차창 너머로 가을이 기울더니 어느덧 마당 항아리 뚜껑에는 살얼음이 낍니다. 겨울이 찾아왔네요. 예년에 비해 따뜻한 겨울이 될 것이라는 예보가 있어도, 1년을 기다린 집안 벽난로에 따끈한 고구마를 기대하며 장작불도 슬슬 지펴봅니다.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아무래도 야생의 겨울은 솎아내기 계절이죠. 가을 준비를 잘 한 녀석들은 겨울 고비를 잘 이겨내겠지만, 사실 많은 수의 동물은 겨울을 넘기지 못합니다. 먹잇감이 부족해지기도 하지만, 겨우내 체온으로 에너지를 계속 뺏겨야 하는 문제도 큽니다. 이를 대비하고자 많은 포유동물은 일찌감치 겨울털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가을 겨울에 잡은 동물의 가죽을 방한용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털이 적는 종이기에 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필품이었죠. 하지만 역사는 흐르고 그 쓰임새는 변합니다. 살기 위해 입어야 했던 모피는 어느덧 치장과 멋으로 바뀌고, 애써 야생에서 잡을 필요 없이 동물이 길러 모피를 얻자라는 발상으로 전환됩니다. 바로 모피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애써 동물을 잡아 고기는 먹고 털과 가죽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장식 생산, 즉 윤리적 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합니다. 밍크, 여우, 친칠라를 넘어서 대량생산에 맞는 너구리와 라쿤으로까지 저변이 넓혀집니다.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의 속성과 맞물려 모피생산 산업은 점점 더 저렴한 방식으로 진화합니다. 얻기 힘든 생명체가 아닌 공장의 1회용 생산품으로 생명의 가치는 전락하고 싸구려가 되어갑니다. 평생 한두 번 목에 두를 수 있는 가치 있는 사치품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생활 소품이 되어갑니다. 아, 모피 입을 만큼 부자가 아니라구요? 하지만 우리가 입는 겨울 패딩에 달린 모자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거 있다고 따뜻한 것도 아닌데 단지 멋을 위해 너구리와 라쿤 털을 벗겨내고 있습니다. 단지 가죽을 벗겨내기 위해 농장에서 그득그득 철창에서 키우고 있습니다. 쉽게 벗기기 위해 채 죽지도 않은 채 벗겨내기도 합니다. 이게 과연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저지를 수 있는 슬기로움인지 궁금해집니다.

너구리 가죽과 털이 달린 패딩 모자. 너구리 가죽을 확인해보고 싶다면 모자에 붙은 부위를 만져보면 된다.

지난 10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새로운 조례가 통과되었습니다. 오는 2023년 1월 1일 발효되면 캘리포니아 주에서 모피로 만든 모든 품목의 제조와 기증, 판매가 금지됩니다. 법을 위반하면 최대 1,000달러 벌금을 내야 합니다. 이로서 캘리포니아는 모피를 금지한 최초의 주가 되지만 이미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 등 많은 자치단체들은 모피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독일과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모피 농업 자체를 금지한 바 있습니다.

너구리 모피농장에서 사육되고 있는 어린 너구리들(출처: Fur Free Alliance)

우리 주변을 조금만 더 살펴보면 타당한 대체품들이 존재합니다. 수많은 유명 의류업체들도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몇 년 전부터는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퍼-프리(fur-free)’ 선언도 잇따르며, 인조 모피인 ‘페이크 퍼(fake fur)’도 유행합니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가짜가 칭찬받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생태계 내의 균형에는 적어도 양심이라는 단어가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활용도 중요하지만, 슬기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이 필요합니다.

김영준 국립생태원 동물복지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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