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 열기… 사상 최고 투표율
“1번 찍었어요. 아, 아니 2번요.”
홍콩 구의원 선거가 치러진 24일 오전 9시 카우룽반도 몽콕 이스트의 체육관 앞. 투표를 마치고 나오던 오(柯ㆍ42)씨는 ‘누구를 찍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흔쾌히 대답하려다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머뭇거리면서 이내 말을 바꿨다. 1번 후보는 반정부 시위대와 뜻을 함께하는 민주파, 2번은 현역의원인 친중파 정당 소속이다. 이곳은 시위대를 체포하기로 악명이 높은 몽콕 경찰서와 200m, 시위대가 최후까지 버티고 있는 홍콩 이공대와는 3㎞가량 떨어져 있다. 유권자들이 섣불리 속내를 드러내기 민감한 곳이다. 그가 실제 어느 후보를 선택했는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노년층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한 살 많은 남편을 부축하고 나온 78세 할머니는 ‘누가 당선될 것 같나’고 묻자 당연하다는 듯 “동네에서 많은 일을 해온 2번 후보가 된다, 우리 둘 다 2번을 찍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6개월간 지속된 시위에 대해서는 “젊은 사람들이 너무 폭력적으로 행동해서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일침을 놓았다.
홍콩섬으로 건너가 아파트 밀집지역 타이쿠의 우체국에 마련된 투표소를 찾았다. 민주당 현역의원 앤드루 치우(趙家賢)가 왼쪽 귀에 붕대를 감은 채 지팡이를 짚고 서서 유권자들과 인사하고 있었다. 지난 3일 근처 쇼핑몰에서 “홍콩은 중국 땅이다”라고 외치며 흉기를 휘둘러 일가족 네 명을 다치게 한 남성을 제지하다 귀가 물어 뜯기면서 입은 상처다.
‘선거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느냐’고 묻자 그는 고무된 표정으로 “과거 선거에서는 홍콩의 미래를 바꾸려는 폭발적인 열기를 느낄 수 없었다”면서 “하지만 가족 단위로, 특히 젊은이들이 이처럼 투표소로 쏟아져 나온 것은 전례 없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국이 사주하는 외곽단체가 무차별로 우리를 공격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던 여성 청(程ㆍ30)씨는 “치우 의원이 끔찍하게 당하는 것을 보고 저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앞다퉈 투표소로 나왔다”며 “테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대표를 뽑아야 주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걸어서 20분 거리인 사이완호의 스포츠센터 투표소로 향했다. 지난 11일 경찰이 시위대에게 실탄 3발을 발사해 한 명이 중태에 빠졌던 교차로와 맞닿은 곳이다. 이날의 충격적인 사건 직후 시위대가 중문대, 이공대 등 대학 캠퍼스를 점거하면서 격한 충돌 양상으로 급속히 번졌다. 초등학생 자녀까지 네 가족이 함께 나온 50대 초반의 부부에게 이번 선거의 의미를 묻자 “시위에 침묵하는 사람들도 많다”면서 “그런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한 표를 어떻게 행사하는지 정부는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아이들도 TV뉴스를 통해 총격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홍콩 전역 633개 투표소에서는 정부를 향해 소중한 권리를 행사하려는 인파가 이른 아침부터 줄을 이었다. 가는 곳마다 적게는 수백m에서 많게는 1㎞ 넘게 유권자들이 줄을 서 몰린 탓에 1, 2시간씩 기다리는 건 예사였다. 몽콕에서 만난 30대 여성은 몸이 불편한 모친을 휠체어에 태우고 왔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이따 오후에 다시 나와야겠다”고 발길을 돌렸다.
지난 6월 이후 반정부 시위로 표출된 민심을 등에 업고 홍콩과 해외 언론 대부분 민주진영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지만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안심할 수는 없었다. 민주진영은 452명의 구의원을 선출할 18개 지역 가운데 위엔랑, 북구 등 8곳을 일찌감치 ‘위험’ 또는 ‘열세’ 지역으로 꼽았다. 대부분 홍콩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본토 유입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번 선거 유권자는 413만 명으로, 4년 전 369만 명보다 크게 늘었다. 젊은 유권자들이 적극 호응한 덕이다. 반면 홍콩 유권자 가운데 중국 출신도 30%에 달한다. 2015년 선거에서 총 452석 가운데 친중파 327석, 민주진영 118석을 차지해 18개 지역 모두 친중파가 싹쓸이했다. 당시 투표율은 47%에 그쳤다.
그래서 민주진영은 성패의 관건인 투표율 목표치를 64%로 크게 높여 잡았다. 이에 화답하듯 투표 종료 시한인 오후 10시30분 현재(잠정) 투표를 마친 유권자가 280만명에 달해 68%에 육박하는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전체 750만 홍콩인 10명 중 7명이 투표소로 몰린 것이다. 특히 투표 마감시간 이후에도 곳곳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유권자 행렬이 이어져 최종 투표율은 70%를 웃돌 전망이다.
20대 중반의 한 여성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당국이 언제든 선거를 취소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침 일찍 투표를 끝내자’는 말이 돌아 일찍 나왔다”고 말했다. SNS에는 이외에도 ‘친중 후보를 찍었다고 자랑할 것’, ‘민주진영 후보에 대한 지지 표시를 삼갈 것’, ‘공연히 마스크를 착용해 투표소 앞 경찰을 자극하지 말 것’, ‘반으로 접힌 투표용지가 무효가 되지 않기 위해 기표 후에 입으로 불어 인주를 말릴 것’ 등 온갖 주의사항이 나돌았다. 요양병원이 많은 타이웨이에서는 관광버스에 노인들을 태우고 투표소로 이동하면서 손에 특정 후보의 번호가 적힌 유인물을 쥐여주는 장면이 적발되는 등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구태도 여전했다. 쿤퉁에서는 일부 유권자 간에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을 빚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홍콩섬을 벗어나 신계의 샤틴을 찾았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해온 지미 샴(岑子杰) 민간인권진선 의장이 출마한 곳이다. 그는 투표소가 마련된 주민센터 인근 거리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지난 8월 18일(당시 170만명 집결) 이후 시위를 모두 금지한 탓에 이번 선거는 시민들이 평화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힐 기회”라며 “민주진영을 선택하면 시위대의 5대 요구사항을, 친중파를 뽑으면 경찰과 폭력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모든 홍콩인은 결국 홍콩을 위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선거 승리를 확신했다.
‘선거 이후 시위가 어떻게 될 것 같나’라는 질문에는 “시위가 더 커지든, 아니면 이대로 끝나든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정부에 달려 있다”면서 “정부가 민의를 수용하면 시위가 멈출 것이고, 무력으로 진압한다면 시위가 또다시 불타오를 것”이라고 답했다. 한 살배기 아기를 품에 안고 아내와 함께 투표를 마치고 나오다 옆을 지나가던 30대 초반 주(朱)씨는 “한국을 보며 우리도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힘을 내왔다”며 “폭력 시위 핑계대지 말고 선거 결과가 나오면 정부의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콩=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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