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원 선거를 사흘 앞두고 21일 저녁 카오룽반도 샤틴 지하철역 쇼핑몰에서 벌어지고 있는 홍콩판 낙선 운동. 바닥에 붙어있는 사틴의 41개 전체 지역구 출마 후보 사진과 그 옆에 지지, 반대 의사를 적어 놓은 포스트잇을 들여다보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시위는 지켜만 봤어요. 하지만 투표는 달라요. 폭력 경찰과 무능한 정부의 잘못을 심판해야죠.”

홍콩 구의원 선거를 사흘 앞둔 21일 저녁 8시쯤 홍콩 카오룽(九龍)반도 지하철 샤틴(沙田)역 쇼핑몰. 팡(彭ㆍ61)씨 모녀는 “이번에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 투표소에 갈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과격 시위가 투표에 영향을 미칠 것 같느냐’고 묻자 딸(29)은 “평화적으로 시위하는데 경찰이 강경 진압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맞서 온 것”이라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투표”라고 반문했다.

이곳에서는 퇴근길 시민들이 빙 둘러서서 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샤틴의 41개 의석을 놓고 경합하는 모든 후보의 사진이었다. 사진 옆에는 각자의 생각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민주진영 후보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은 가장 양심 있는 사람’ 등 찬사 일색인 반면, 친중 후보 옆에는 욕설과 함께 ‘차이나치(차이나+나치)’ ‘홍콩 주민을 깔아뭉개는 중국의 하수인’이라는 험한 글귀가 가득했다. 얼굴 사진 배경도 민주진영은 하얗거나 밝은색, 친중 후보는 칙칙한 회색으로 구분해 놓았다. 선거를 앞두고 공개적으로 유권자의 편을 가르는 홍콩판 ‘낙선’ 운동인 셈이다.

난생처음 접하는 광경에 시민들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쇼핑몰 기둥 곳곳에는 홍콩 최대 규모의 친중파 정당인 민주건항협진연맹(민건련)을 비난하며 ‘민건련에 투표하면 당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것’이라는 경고 문구를 달았다.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에 반대하다 지난 9월 22일 바닷가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된 여성 수영선수의 사진도 함께 걸렸다. 경찰과 맞설 때마다 시민들을 독려했던 ‘영광이 다시 오길(Glory to Hong Kong)’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가 울려 퍼져 마치 시위 현장에 와 있는 듯했다.

홍콩 시민들이 21일 저녁 샤틴역 뉴타운 플라자 기둥에 붙어있는 최대 규모 친중 정당 '민건련' 비판 포스터와 지난 9월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된 여성의 사진(오른쪽 위)을 바라보고 있다. 이 쇼핑몰은 지난 7월 무장경찰이 사상 초유의 진압작전을 펼쳐 시위대와 격렬히 충돌했던 곳이다. 김광수 특파원

샤틴은 홍콩 18개 지역 가운데 가장 많은 구의원을 선출하는 곳이다. 지난 7월 14일 평화롭게 시위하던 시민들을 진압하러 무장경찰이 밀고 들어와 쇼핑몰 안에서 사상 초유의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앞서 11일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실탄 발사로 양측의 충돌이 격해질 때도 샤틴 중문대가 최전선이었다. 당시 경찰은 하루 동안 1만1,576발의 최루탄과 1,312발의 고무탄을 투입해 홍콩 사태 이후 최대 규모의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경찰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클 수밖에 없다. 중문대 시위대는 나흘 만에 해산했지만 홍콩 이공대가 바통을 이어받아 경찰에 끝까지 저항하고 있다.

15개월 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지켜보던 여성 차우(周ㆍ32)씨는 “사진 옆에 적힌 메모를 보며 우리 동네 출마 후보에 대한 당초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며 “이전 선거 때는 주변 사람들이 투표하든 말든 신경 안 썼는데, 이번에는 다 같이 투표하자고 서로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姚ㆍ72)씨는 “어린 학생들이 너무 불쌍하다”면서 “투표는 홍콩 시민들이 민주진영을 얼마나 지지하는지 정부에 확실히 보여 줄 기회”라고 거들었다.

4년 전 투표는 민주진영의 처참한 패배였다. 총 452석 가운데 친중파 327석, 민주진영 118석을 차지해 18개 지역 모두 친중파가 싹쓸이했다. 투표율을 보면 18~30세는 30.3%에 불과한 반면 31~45세는 35.3%, 46~60세는 42.4%, 61세 이상은 45.6%로 나이가 들수록 투표장을 더 많이 찾았다.

이번에는 반정부 시위가 6개월 가까이 지속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젊은층이 앞다퉈 투표 열기에 가세하고 있다. 등록 유권자는 413만명으로, 2015년 369만명보다 크게 늘었다. 452개 선거구 모두에서 두 명 이상의 후보가 출마해 경쟁하는 건 사상 처음이다. 4년 전에는 민주진영이 후보를 내지 않아 속절없이 의석을 내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건너편에는 18세의 친구 사이인 남녀 4명이 무리 지어 서서 신기한 듯 사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올해 처음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그들에게 투표가 어떤 의미냐고 묻자 “홍콩의 정치와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면서 “한쪽 진영이 의회를 싹쓸이하는 바람에 홍콩이 지금 이 모양이 된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이번 선거가 나의 소중한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며 “송환법 철회로는 어림없고 행정장관 직선제까지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콩 구룡반도의 주택가인 푸윙에 출마한 3명의 후보 가운데 21일 민주파 소속(가운데) 후보의 현수막만 곳곳이 훼손돼 있다. 시위대가 경찰과 격렬하게 맞선 홍콩 이공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김광수 특파원

하지만 표심은 뚜껑을 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위층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막 내리려는데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성이 무언가를 휙 채더니 손으로 마구 구기면서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시민들이 반정부 구호를 적어 기둥에 붙여 놓은 두 장의 포스트잇이었다. 그래서 10m가량 남성을 따라가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시위 현장도 아닌 곳에서 난데없이 외국 기자가 나타나 말을 걸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목소리를 높이며 “바빠서 가야겠다, 할 말이 없다”며 손을 뿌리쳤다.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못마땅해하는 ‘샤이(shy) 친중’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홍콩 친중 정당인 민건련 소속 충콩모 후보가 21일 오후 푸윙의 주택가에서 조용히 나홀로 유세를 펼치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시위가 홍콩 시민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지만, 동네마다 유권자의 표심은 미묘하게 갈렸다. 시위대의 최후 보루 홍콩 이공대와 3㎞가량 떨어진 푸윙(富榮)의 주택가를 찾았다. 민건련 소속 충콩모(鍾港武ㆍ45) 후보가 홀로 아파트 주민들에게 홍보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 ‘민주’ ‘혁신’ 등 시위와 연관된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역의원이자 12년째 구의원을 지낸 그는 “오늘보다 나은 생활 개선을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웠다”며 “나는 지역 일꾼”이라고 말했다. ‘너무 조용한 것 아니냐’고 묻자 “점잖은 주민들이 많아 마이크 잡고 떠들면 다들 싫어한다”고 설명했다. 아파트와 접한 초등학교 앞 육교 담벼락에는 ‘경찰 자녀와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쓴 검은 스프레이 자국이 선명했다. 일부 시위대가 찾아와 협박한 것이다. 반면 아파트 입구에는 3명의 후보 가운데 민주파 소속 기호 2번의 플래카드만 얼굴에 구멍이 뚫리고 곳곳이 찢어져 훼손돼 있었다. 안정을 추구하고 과격 시위와는 거리를 두려는 동네 주민들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홍콩 독립민주파 소속 오완리(가운데) 후보가 21일 저녁 길거리 유세 도중 몰려든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반면 걸어서 10분 거리인 타이콕추이 노스(大角咀北)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독립민주파 소속 오완리(李傲然ㆍ27) 후보는 해가 저문 뒤에도 확성기를 들고 행인들과 손을 맞잡으며 유권자들과 살갑게 교감했다. 홍콩 이공대 집행위 학생 대표이기도 한 그는 “시위로 삶이 어려워진 분들을 도우려는 게 출마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를 알아보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50대 여성은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설 것”이라며 “친중파 후보도 출마했다는데 대체 누군지 얼굴을 본 적도,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홍콩섬 동쪽 타이쿠 지역의 원아일랜드이스트 빌딩 앞 공원. 홍콩에서 7번째로 높은 이 빌딩과 주변 근무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22일 낮 플래시몹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지만 취재진과 경찰 수십 명이 오갈 뿐 평소와 다름 없는 모습이다. 선거를 앞두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김광수 특파원

시민들은 22일 예고한 3곳의 플래시몹 점심 시위를 취소했다. 행여나 선거가 연기되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거리에서도 21일부터 시위는 자취를 감췄다. 22일 홍콩섬 타이쿠(太古)에서 만난 20대 중반의 여성 직장인들은 “투표는 민주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정책을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구의원에 그치지 않고 다음 입법회(우리의 국회)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콩 유권자들은 그렇게 조용히 정부를 향한 거센 반격을 벼르고 있었다.

홍콩=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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