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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극장 쥐 잡기 위해 고양이 투입… 우여곡절 끝에 부산영화제 출범

입력
2019.11.23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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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국내에 영화제 씨앗 뿌린 부산국제영화제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을 때 남포동 한 극장 주변에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을 때 남포동 한 극장 주변에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부산국제영화제의 불씨를 지핀 건 젊은 영화평론가들이었다. 영화제 창립 멤버인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은 1980년대 중반부터 두텁게 교우하며 비평 활동을 전개하던 열정적인 영화 학도들이었다. 그 당시 영화 학도들은 타는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글 자막도 달지 않은 열악한 화질의 비디오가 아니면 프랑스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이 영화에 대한 열망을 채워줄 통로였고, 다양한 영화를 제대로 된 극장 환경에서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985년 3월 경성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부임한 이용관은 평론가인 이충직, 강한섭, 유지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전양준을 강단에 세우며 영화 교육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환경을 극복하고자 분투 중이었다. 이때 김지석은 경성대 근처의 프랑스문화원을 거점 삼아 친구 오석근 감독과 함께 씨네클럽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서로 지척에 있던 이들은 자연스레 한데 모여 의기투합하게 되었고 1989년 계간 영화평론지 영화언어를 창간하게 된다.

2004년 10월 6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하루 앞두고 중구 남포동 PIFF광장에서 열린 영화제 축하 전야제에 많은 인파가 몰려 축제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4년 10월 6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하루 앞두고 중구 남포동 PIFF광장에서 열린 영화제 축하 전야제에 많은 인파가 몰려 축제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제 산파 역 한 ‘영화언어’ 

김지석은 1991년 일본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참석하면서 국제영화제를 열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상한 바 있다. “미국, 홍콩, 서유럽 영화 이외의 영화는 거의 보기 힘든 국내 영화 문화 환경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야마가타 영화제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중략) 이때의 충격으로 이후 나는 홍콩영화제, 싱가포르영화제 등을 자비로 다니며 국제영화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영화의 바다 속으로’, 김지석 저) 1992년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에서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스의 주도로 ‘한국영화 특별전’이 마련되면서 영화제를 현실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페사로영화제의 아드리아노 아프라 집행위원장은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에서 본 한국영화 중 대표작 30편을 골랐는데 이 영화들을 소개하는 영문 책자의 원고 작업을 영화언어에서 맡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페사로영화제를 방문하게 된 김지석, 이용관, 전양준은 이 소박한 지역 영화제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국제영화제를 여는 게 꿈만은 아니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1994년 11월 21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주최로 부산일보 건물 소강당에서 열린 공개 세미나에서 김지석은 국제영화제의 창설과 지역에서의 영화 제작 가능성에 대해 발제한다. 이 세미나는 한국에도 국제영화제가 필요하다는 여론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서울에서 국제영화제를 여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여론이 대세였던 이때, 김지석은 “부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화 운동이 영화제를 탄생시키려 하는데 굳이 서울로 옮아갈 필요가 없다”며 영화제 개최지로 부산을 고집했다. “세계 유명 영화제들이 해안 휴양지를 끼고 있다”는 그의 말마따나 부산은 바다라는 천혜의 입지를 갖추고 있었고, 영화제 행사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선 다수의 극장이 인접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부산 남포동 광장은 상영 인프라를 충족시킨 최적의 장소였다. 파라다이스 호텔이 5억원을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면서 영화제 개최에 필요한 종잣돈을 마련할 길이 열리자 남은 건 영화제 조직의 인적 구성을 다듬는 것이었다.

1995년 8월 18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가진 만남에서 김동호 전 영화진흥공사 사장이 집행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영화제를 진두지휘할 사령탑이 마련된다. 때마침 ‘101번째 프로포즈’(1993)를 완성하고 이명세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1995)를 도와주기 위해 부산에 내려온 오석근 감독이 사무국장 자리에 바로 스카우트되었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촬영에 난항을 겪던 박광수 감독이 부집행위원장을 제안 받으면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주요 부문 인적 구성은 마무리된다.

축적된 노하우가 있을 리 없었던 초창기에 김 집행위원장과 박 감독 투톱 체제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 한데다 해외 영화제 출장 경험이 많았던 김 위원장은 파라다이스 호텔이 지원을 철회하자 인맥을 활용해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영화제에 필요한 각종 지원과 22억원의 예산을 이끌어냈고, 김 위원장에게 포섭되어 어드바이저 역할을 맡은 폴 리는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한 경험을 살려 해외 게스트 초청과 영문 카탈로그 제작 등 영화제 운영에 필요한 시스템 구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박 감독은 프로젝트 마켓을 비롯한 영화제 실무의 큰 방향을 잡았고, 상영작을 선정하는 프로그래머의 역할은 이용관이 한국영화, 전양준이 미국과 유럽 영화, 김지석이 아시아 영화를 전담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1996년 1월 김 위원장 자택에 모인 영화제 멤버들은 이 날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가 중심이 되는 비경쟁 영화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2월 13일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창립총회가 열렸고, 6월 4일 영화제 사무국이 수영만 요트경기장 본부 건물에서 현판식을 치르게 되었다. 이 때 작은 촌극이 있었다. 시에서 직접 현판식을 집행하겠다고 나서자 영화제 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이 주관이 되면 안 된다”고 뜯어말리며 가까스로 무산시킨 것이다. 민관 합작 영화제의 추진 과정에서 일어나는 잡음은 개막 직전까지 영화제 멤버들을 괴롭혔다. 스크린 대여료를 비롯해 필요한 예산이 제때 집행되지 않자 오세민 당시 정무부시장이 오석근 사무국장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5,000만원을 급히 대출받아 해결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다행히 문정수 당시 부산시장이 영화제에 관련된 서류를 우선적으로 처리해주는 배려를 하면서 “민관 갈등의 완충지대” 역할을 도맡았고 덕분에 영화제는 착실히 준비를 갖춰나갈 수 있었다.

2012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모습. 부산영화제는 영화제 전용 공간인 영화의전당 건립을 통해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2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모습. 부산영화제는 영화제 전용 공간인 영화의전당 건립을 통해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많아야 5만 관객 예상했는데… 

1996년 9월 13일 저녁 6시30분 부산국제영화제는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1996)을 개막작으로 내건 이 날, 수영만 야외 상영장은 조용필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오케스트라 연주로 흐르는 가운데 5,000여명의 관객이 참석해 신생 영화제의 출발을 맞았다.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개막식 날까지 팔려나간 입장권은 5만장이 넘었고, 남포동 PIFF광장은 31개국 169편의 작품을 상영하는 8일간의 일정 내내 인파로 넘쳐났다. 상업 영화에 질려 있던 관객들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안개 속의 풍경’(1988), ‘데드맨’ ‘증오’ ‘공각기동대’ ‘메모리스’ ‘동경의 주먹’(1995) 등 잇달아 쏟아지는 문화적 충격의 세례에 환호했다. “다시 말해 영화제가 우리의 능력 범위를 넘어선 거야. 처음 우리가 준비하면서 내기를 했는데 관객 3만~5만명 정도였지. 전부 그랬지. 어느 누구의 예측도 7만명을 넘지 못했거든”(이용관 발언, ‘부산국제영화제’, 김호일 저)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객의 수는 예상치의 세 배를 웃도는 18만 6,000명이었다.

관객들이 축제의 열기에 젖는 동안, 영화제 실무진은 속출하는 사고를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단편 영화 ‘다우징’(1996)의 상영 땐 포커스가 나가는 바람에 감독이 영사기로 뛰어가는가 하면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 상영 땐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는 사고가 났고, 국내에 자막 시스템이 없어 급히 일본의 자막 시스템을 구입해 한글 자막을 삽입했지만, ‘월드 시네마’의 일부 상영작은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해 영문자막으로 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상과 자막이 일치하지 않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압권이었던 건 베를린영화제 포럼 집행위원장 울리히 그레고르가 극장 안에서 쥐에게 물린 사건이었다. 극장 내 음식 반입을 통제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이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영화제 측에선 고양이를 투입하는 응급조치를 취했는데, 쥐가 조용해지자 다음엔 고양이가 문제였다. 영화 상영 때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이번엔 자원봉사자들이 고양이를 잡느라 극장을 헤집고 다녀야 했다.

다사다난했지만 부산영화제의 첫 회는 성공이었다. 작은 한 걸음이었지만 ‘아시아 최대의 영화축제’라는 미래를 향한 크나큰 도약이었고, 이후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같은 후발 주자들이 등장하는 데 있어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그리고 국제영화제의 유행이 일어나려던 이 시기, 한국영화는 새로운 르네상스의 시대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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