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제1차 은데벨레전쟁 샹가니강전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893년 은데벨레왕국(현 짐바브웨)과 영국군의 샹가니강전투를 묘사한 그림. 그림에 표현된 대로 영국군은 압도적 화력을 앞세워 상대의 7분의 1 수준인 병력 열세를 너끈히 극복했다. 당대 영국의 저명 종군화가인 리처드 캔튼 우드빌 주니어의 작품이다. ⓒ위키피디아

1893년 10월25일 밤, 5,000명의 은데벨레군은 은밀하게 샹가니강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강변에 숙영지를 설치한 700명의 영국군 부대였다. 로벤굴라 쿠말로가 통치하는 당시의 은데벨레왕국은 현재의 짐바브웨에 해당했다. 은데벨레는 아프리카 남부에 살던 줄루의 일부로서 약 200만 명의 인구를 가졌다.

서구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부터 왕국을 지키기 위한 로벤굴라의 고심은 깊었다. 옆 나라 남아프리카의 보어들은 은데벨레왕국을 보호국으로 간주하려 했다. 아직 지역 내 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영국은 영토적 야심을 감추고 경제적 이권에만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자신들을 포장했다.

 ◇원주민 왕과 영국 총독의 동상이몽 

1888년 로벤굴라는 영국 식민지 케이프의 총독 세실 로즈와 러드협정을 체결했다. 러드협정의 핵심은 은데벨레 영토 내의 독점적인 금 채굴권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반대급부로 로벤굴라는 1,000정의 마티니-헨리소총과 10만 발의 탄환, 1척의 증기전투선, 그리고 매달 10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은데벨레군은 약 700정의 소총을 가졌지만 탄환이 전무해 소총을 쓸 수가 없었다. 로벤굴라는 로즈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남아프리카가 공격해올 경우 영국이 막아주리라는 계산을 했다. 또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부족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데에도 로즈가 제공할 무기가 요긴하다고 생각했다.

로즈의 욕심은 물론 금에만 있지 않았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지배했듯이 1889년에 로즈가 설립한 영국남아프리카회사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지배를 넓히기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케이프의 다이아몬드채굴과 판매를 독점하는 드비어스의 설립자 역시 로즈였다. 이어 영국남아프리카회사가 관리하는 지역에 로디지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글자 그대로 ‘로즈의 땅’이라는 뜻이었다. 20세기 후반까지도 영국의 보호령으로 존속했던 로디지아는 1980년에 독립하면서 짐바브웨로 국명을 바꿨다.

1893년 8월 로디지아의 부족 하나가 로벤굴라에게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신들은 이제 로벤굴라가 아닌 영국남아프리카회사가 통치하는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체면이 깎인 로벤굴라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수천 명 병력을 보내 해당 부족을 토벌했다. 영국은 영국남아프리카회사의 권리가 침해됐다고 주장하며 은데벨레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은데벨레군이 거부하자 영국군은 40여 명의 은데벨레 병사를 사살했다. 영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했던 로벤굴라는 “백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하면 너희 모두를 죽이겠다”고 토벌 전에 경고했다. 은데벨레군은 무력하게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기관총으로 절대우위에 선 영국 

영국은 위 사건을 은데벨레를 집어삼킬 좋은 핑계거리로 여겼다. 1893년 10월16일, 소령 패트릭 포브스가 지휘하는 700명의 영국군은 은데벨레의 수도 불라와요를 향했다. 수도와 왕위를 위협받게 된 로벤굴라는 이제 영국군에 대한 공격을 승인했다. 2,000정 이상의 소총과 아세가이라는 투창으로 무장한 은데벨레군은 당시 아프리카 기준으로는 최상의 군대였다. 기습적인 야간 공격과 7 대 1이라는 병력 차를 감안하면 은데벨레군이 소수의 영국군을 쓸어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로벤굴라가 계산하지 않은 변수가 하나 있었다. 이른바 ‘비도발적 무기정책’이었다. 영국이 로벤굴라에게 제공한 소총은 부족간 전투 때는 위력이 막강했지만 영국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구식의 무기였다. 즉 은데벨레군이 가져도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기에 줬던 거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1871년산 마티니-헨리는 영국군이 쓰던 1888년산 리-메트포드에 비해 유효사거리가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분당 발사횟수도 12회로 리-메트포드의 20회에 비해 열세였으며, 반동이 심하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걸로도 악명 높았다. 그럼에도 은데벨레군과 포브스 부대의 병력 차를 생각하면 이는 극복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보다 결정적인 무기는 포브스 부대가 보유한 5정의 맥심기관총이었다. 말년에 영국으로 귀화한 미국인 하이람 맥심이 1884년에 만든 맥심기관총은 분당 600발의 총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맥심기관총의 압도적으로 빠른 발사속도는 당시 장점이기보다는 약점으로 인식되었다. 탄환 소모가 너무 빨라서 국고를 거덜낼 거라는 걱정이었다. 아무도 사지 않던 맥심기관총을 1888년 세계 최초로 구입한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맥심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초년기에는 여러 유용한 장치를 발명했다. 그중 하나는 건물 내 화재 발생 시 자동으로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였다. 그는 이에 대한 특허를 받았지만 이를 사용하려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맥심은 1870년대 후반에 최초의 전등을 뉴욕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백열전구에 대한 특허권 소송에서 토마스 에디슨에게 지고 말았다. 큰 돈을 벌고 싶었던 맥심은 결국 사람을 더 효과적으로 죽이는 치명적인 무기를 개발했다.

무기의 경제성을 평가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비용-효과분석이다. 비용-효과분석은 동일한 금액의 무기 제조 혹은 구입 비용에 대해 목적하는 효과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는 방법이다. 효과를 같은 시간 내에, 예를 들어 5초 동안 쏠 수 있는 총탄 수로 정의한다면 맥심기관총은 50발, 마티니-헨리는 1발이었다. 비용은 당시 돈으로 맥심기관총은 1정에 250파운드, 마티니-헨리는 1정에 8파운드 정도였다. 즉 같은 250파운드를 들였을 때 맥심기관총 1정과 마티니-헨리 31정을 살 수 있었고, 이는 각각 50발과 31발의 발사된 총탄에 해당했다.

영국군이 제1차 은데벨레전쟁에서 첫 선을 보인 맥심기관총. 영국군 승리의 수훈갑이었다. ⓒ위키피디아
 ◇극적으로 드러난 무기의 경제성 

은데벨레군의 야습은 오전 2시경에 개시되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야습에 대비하기 위해 영국군은 숙영지를 마차로 둥글게 둘러싸는 일명 ‘마차요새’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아침에 해가 뜬 후 은데벨레군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로 후퇴했다. 맥심기관총의 위력은 예상 이상이었다. 작동 중인 기관총을 향해 돌격하는 행위는 무모했다. 약 1,500명의 은데벨레군이 이날 전사했다. 포브스 부대의 전사자는 4명에 그쳤다. 은데벨레군을 지휘했던 마논다는 전장에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375 대 1이라는 손실교환비가 발생한 샹가니강전투는 맥심기관총이 최초로 실전에 사용된 전투였다.

맥심기관총을 가진 포브스 부대와 마티니-헨리로 무장한 은데벨레군의 실제 전투력 차이는 375 대 1이라는 손실교환비보다도 더 컸다. 원거리 사격전을 가정할 때 양 군대의 전투력 차이는 2,200배 이상이었다. 만약 이 전투력 차이가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은데벨레군은 남은 3,500명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겨우 2명을 더 죽일 수 있었다.

은데벨레군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인 11월1일, 불라와요 북쪽 50㎞ 지점에 위치한 벰베지에 매복한 채 영국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6,000명의 은데벨레군은 용감하게 공격했지만 결과는 샹가니강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은데벨레군은 약 2,500명을 잃고 물러났다. 다만 영국군도 맥심기관총이 없을 땐 결코 무적이 아니었다. 12월4일, 소령 앨런 윌슨이 이끄는 37명의 분견대는 잠적한 로벤굴라를 찾기 위한 수색 작전 중에 은데벨레군의 공격을 받았다. 용케 도망친 3명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1894년 1월 하순 로벤굴라는 병이 악화되면서 숨졌다. 은데벨레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된 음잔은 영국남아프리카회사에게 은데벨레에 대한 통치 권한을 넘겼다. 1896년 은데벨레인들은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개시했다. 영국은 이를 2차은데벨레전쟁이라고 불렀다. 영국군의 맥심기관총은 여전히 너무나 강했다. 2차은데벨레전쟁은 다음해인 1897년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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