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할 수 있을까?’ 캐스팅 우려 뚫고 신스틸러로 
 “신곡 녹음한 뒤 음반 발매 포기하고 잡은 작품” 
 입에 코르크 넣고 발음 연습… 10년 차 배우의 안간힘 
 “사기 등 풍파 겪고 단단해진 나와 닮은 향미” 
가수 겸 배우 손담비는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신스틸러였다. “태어나서 ‘악플(악성댓글)’안 받긴 처음이에요.” 손담비도 10년 만에 드라마로 받은 관심이 신기했다. 키이스트 제공

‘손담비가 향미 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올 상반기에 가수 겸 배우 손담비가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향미 역에 낙점됐을 때 제작 관계자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향미가 극에 비장미를 돋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어서다. 배우로서 여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손담비가 주인공처럼 비중 있는 이 배역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향미처럼 눈치 보며 시작한 드라마 

손담비는 주위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습뿐이었다. 손담비는 대본을 받은 뒤 입에 포도주 뚜껑인 코르크 마개를 물고 살았다. 발음 교정을 위해서였다. 그와 친한 연기 선배인 정려원에게 들은 비법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손담비는 이비인후과를 찾아가 발음 교정까지 받았다.

정확한 발음을 내기 위해 쓴 안간힘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코맹맹이 소리에 부정확했던 발음은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난 9월 ‘동백꽃 필 무렵’ 첫 방송이 나간 뒤 손담비를 향한 우려는 기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지저분해질수록 손담비에 꽂혔던 냉랭했던 시선에 볕이 들었다. 캐릭터의 경제적 빈궁함에 맞춰 지난 6월부터 머리카락 뿌리 염색을 일부러 하지 않은, 치밀한 캐릭터 분석으로 얻은 성과였다. 지난달 24일 ‘동백꽃 필 무렵’에서 향미가 살해되는 장면이 나오자 온라인엔 향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거짓말처럼 쏟아졌다. 손담비가 배우로 거듭난 결정적 순간이었다.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향미 역을 연기한 손담비. 팬 엔터테인먼트 제공

손담비는 2009년 드라마 ‘드림’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손담비가 10년 만에 배우로 새로 태어난 이날, 그는 ‘동백꽃 필 무렵’의 임상춘 작가로부터 장문의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모든 사람이 저한테 향미를 물어요’라고 작가님이 카톡을 보냈어요. 이렇게 잘해줄지 몰랐고, 잘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죠. 너무 감동해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 ‘동백꽃 필 무렵’의 고된 여정을 들려주던 손담비의 눈이 붉어졌다. 반면 그의 입술은 하얗게 곳곳이 벗겨져 있었다. 고된 촬영과 마음고생으로 “입술이 부르텄다”고 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손담비는 아직 향미였다.

“향미가 동백(공효진)이한테 ‘너도 잊지 마. 엄마니 동생이니 다들 나 제끼고 잘 사는데 너 하나는 그냥 나 좀 기억해주라’라면서 울잖아요. 대본 받고 펑펑 울었어요. (경북) 포항에서 마지막 촬영할 때 이 장면 찍었는데 촬영하고도 눈물이 안 멈추는 거예요. 사무치게 슬퍼 꺽꺽 울었죠.”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출연 배우들과 손담비(왼쪽 두 번째)가 찍은 사진. 손담비 사회관계망서비스
 ◇”향미로 늘 불안한 삶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 

술집 물망초 마담의 딸인 향미는 천덕꾸러기였다. ‘술집 딸’ ‘부모가 버린 자식’이란 이유로 학부모로부터 때론 동네 주민으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환대보단 손가락질을 받다 보니 그의 말투는 어눌해졌고, 표정은 빛을 잃었다. 그렇게 쪼그라든 향미가 손담비도 늘 안쓰러웠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할 줄 모르는 캐릭터잖아요. 비뚤어진 향미를 연기하면서 늘 불안한 삶 그리고 역경에 놓인 여성의 삶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이다. 향미는 유명한 야구 선수 부인으로 살며 관심을 얻고 싶어 하는 철없는 제시카(지이수)를 “관종”이란 독한 말로 찌른다. “들고나온 게 개패인데 뭘 열심히 사는 척을 해. 더 구질구질하게”란 말로 ‘수저계급론’에 멍든, TV밖 현실에 대한 일갈도 잊지 않는다. 향미가 드라마에서 종종 쏘아 올린, 반격은 울림이 컸다. 향미의 강단 있는 모습은 ‘사연 많은 오뚝이’ 손담비를 만나 더욱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다.

“우여곡절이 많았잖아요. 사기도 진짜 많이 당했고. 풍파를 겪다 보니 저도 단단해진 거고요. 역경을 통해 얻은 건 하나예요.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선택을 하면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거요. 가수로 무대에 오래 서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요. 제 삶의 신조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예요. 향미 역을 연기할 때 늘 품고 있던 생각이죠.”

배우로 주목받기까지 고비도 많았다. 손담비는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2014)에서 철부지 며느리로, ‘미세스 캅2’(2016)에서 강력계 형사 역을 맡아 변화를 시도했지만 늘 2%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가수 출신 배우’ 등 그를 둘러싼 선입견의 벽은 쉬 허물어지지 않았다. 노래 ‘미쳤어’(2008)와 ‘토요일 밤에’(2009)로 스타 반열에 올랐던 가수는 연기를 시작하면서 점점 조연으로 밀려났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버텼다.

“가수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떼는 데 오래 걸릴 줄 알았어요. 드라마나 영화 배역 논의할 때도 ‘섹시한 이미지가 너무 강한데’란 걱정도 늘 들었고요. 그런데 전 시작부터 잘 된 적이 없어요. ‘미쳤어’로 주목받았지만 그 전에 전 이미 두 장의 앨범을 냈고 외면받았죠. ‘미쳤어’는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찾아온 행운이었어요. 연기도 마찬가지라고 봤어요. ‘내게 맞는 캐릭터가 있을 거야’란 생각을 하며 믿고 왔어요. 힘들었지만 정말 기다리길 잘한 것 같아요.”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출연한 손담비는 지난 19일 배우들과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시청률 20%대에 육박하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아 드라마를 추억하기 위한 자리였다. 키이스트 제공
 ◇”무대에 자유롭게 오를 날 기다려요” 

힘들 땐 주변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손담비의 든든한 지원군은 공효진이었다. “대사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연기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공)효진 언니가 대사에 너무 갇히지 말라는 거예요. 맥락을 이해하고 진짜로 부딪혀보라고요. 그러면 다른 것들이 네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거라고요. 그렇게 해봤더니 진짜 준비하지 못했던 것들이 툭툭 나오더라고요.” 극에서 노규태를 연기한 오정세는 느닷없는 농담으로 손담비가 촬영장에서 긴장을 푸는 데 적잖이 도움을 줬다.

촬영을 마친 손담비는 지난주 머리카락을 까맣게 새로 염색했다. 그는 염색하면서 또 눈물을 떨궜다. 향미와의 진한 이별을 준비하며 손담비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사실 ‘동백꽃 필 무렵’ 촬영하기 전에 음반을 준비하고 있어요. 음반에 실을 한 곡은 녹음까지 끝내놓은 상황이었죠. 그런데 우연히 향미 역이 들어왔고, 음반 제작을 포기했어요. 2013년부터 신곡을 안 냈어요. 영화, 드라마 제작진 쪽에서 섹시 이미지가 강하다는 말을 들어 그 선입견 없애려고 전 무대 활동을 포기했죠. 선택했어야 했으니까요. 나중에 제가 좀 더 연기가 자연스러워지면 그땐 저도 자유롭게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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