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흰머리가 늘었습니다. 뽑다 보니 100개가 넘었습니다. 어머니가 족집게를 빼앗으며 말씀하시더군요. “탈모도 있으면서! 차라리 염색 시작해.” 저는 항변했지요. “그거 하면 쭉 해야 한다며... 그러기엔 난 너무 어려!” 엄마는 촌철살인 한마디를 남기며 주방으로 떠나셨지요. “어이구, 그 나이가?”
거울을 보니 확실히 어리지는 않더군요.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리기는커녕 법적 ‘청년’도 이젠 지났다는 걸요. 아직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했던 거지요. 그래서인지 ‘나이듦에 담담한’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김희애 배우도 그중 한 명입니다. 오랜만에 그녀의 주연작이 개봉됐다기에, 흰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영화관으로 향했지요.
김희애, 김소혜 주연의 영화 ‘윤희에게’는 슬쩍 보면, 90년대 ‘러브레터’를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엄마의 첫사랑이 보낸 편지를 몰래 본 딸 새봄이, 엄마 윤희와 함께 첫사랑을 찾아 이국의 설원 마을을 걷는 이야기입니다. 잔잔하면서 예측 가능한 스토리였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첫사랑 역인 주연 ‘남우’가 없는 거 아니겠어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인터뷰를 찾아보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김희애 배우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소수자를 다룬 이야기”라고 말했더군요. 위키백과에도 퀴어 영화로 분류가 되었고요. ‘여배우’ 중에 첫사랑이 있던 셈입니다. 저는 살짝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기사에 다 나온다 해도 꽤 중요한 반전일 텐데, 이미 알아버려 지루하려나?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부분은 반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짜 반전은 퀴어 영화인 줄 알고 봤더니, 핵심은 그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보면 스토리의 큰 줄기가 레즈비언의 굴곡진 삶과, 모녀의 화해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소재’이지,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저런 장면들을 보며, 어쩌면 진짜 주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텅 빈 마음으로 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윤희’이며, 그들에게 건네고픈 어떤 메시지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혼과 재혼, 그 사이에 놓인 자녀의 복잡한 마음들을 그려낸 점도 그렇고요. 정당하게 모은 연차 며칠을 쓰겠다는 말 한마디에 너무 쉽게 해고를 강요받는 장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언어 폭력을 자행하는 형제들. 그들에게 끝내 절연을 선언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서로를 안아 보지 않았던 가족이 생애 첫 포옹을 하며 어색함을 느끼는 모습은 현재진행형의 우리 가족이더군요. 이렇게 영화는 스토리 내내, 성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관객 모두에게도 한 번쯤 스쳐 갔을 법한 삶의 장면들을 담담히 그려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으셨나요? 가족이 주는 상처, 사랑의 실패, 일자리의 불안정, 나이가 들며 자연스레 포기한 나의 가능성.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버린 순간 말입니다. 혹시 그런 때 거울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동자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는 않던가요? 영화 초반 윤희의 눈빛처럼 말입니다. 러닝타임 내내 한 번도 웃지 않던 윤희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처음으로 웃음 짓습니다. 평생 외면하려 애썼던, 가장 숨기고픈 자신의 모습을 직면한 뒤에야 말이지요.
결국 영화는 영화 속 한 명의 ‘윤희’가 겪는 소수자의 삶, 첫사랑의 절절함을 말하려 하던 것이 전부는 아닐지 모릅니다. 오히려 달아나고픈, 외면하고픈 내 모습을 지닌 ‘세상 모든 윤희들’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영화 속 윤희처럼, 당신도 마주할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고, 되레 그 직면이 당신을 다시 빛나게 할지 모른다는 말을요.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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