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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보졸레누보가 도착했습니다

입력
2019.11.20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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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보졸레누보용 포도를 일일이 손수확하는 모습. 보졸레 와인협회 홈페이지 캡처
보졸레누보용 포도를 일일이 손수확하는 모습. 보졸레 와인협회 홈페이지 캡처

지난주에 김장을 했다. 오래 두고 먹을 김치와 바로 먹을 김치로 나눠 담갔다. 김장하는 날에는 돼지고기 수육을 빼놓을 수 없다. 노란 배추 속잎에 담백하게 익은 수육을 양념과 함께 올려 한입 가득 먹는 맛이란!

그러고 보면 와인 양조도 김장과 닮은 데가 많다. 유산균을 품은 김치가 김칫독에서 발효되며 맛이 들듯, 효모를 품은 와인은 오크통에서 발효, 숙성한다. 묵은지처럼 오래 숙성해야 하는 와인이 있는 반면, 생절이처럼 만들어 바로 먹는 와인도 있다. 보졸레누보가 바로 그런 와인이다.

보졸레누보로 대표되는 햇와인은, 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생산된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수십여 곳에 이른다. 우리나라에는 1999년에 처음 소개됐는데, 얼마 전 보졸레누보를 앞장서 알린 와인나라 이철형 대표와 만났다. 그는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보졸레누보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했다. “보졸레누보를 기다리며 전 세계 사람들이 축제를 벌였습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 0시가 되면 표준시가 빠른 한국과 일본은 프랑스보다 8시간 먼저 축배를 들었죠.”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햇와인을 와인의 한 스타일로 즐길 수 있었으면 한다고 그는 얘기했다.

보졸레 지역 포도밭. 보졸레와인협회 홈페이지 캡처
보졸레 지역 포도밭. 보졸레와인협회 홈페이지 캡처

오래된 빈티지도 아닌 ‘한갓 햇와인’에 왜 사람들이 매료됐을까? 이 까닭을 추적하다 보면 2차 세계대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야기를 풀기 위해 ‘12년생 앙리’를 소환해보겠다. 물론 ‘앙리’는 82년생 ‘지영’과 비슷한 가상의 필부임을 밝힌다.

포도 수확이 한창이던 1945년의 초가을이었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던 앙리는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봄,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전장에서 독일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감격했던가. 6년 만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북받쳤다.

앙리의 집안은 대대로 포도농사를 지어 와인을 만들었다. 그는 술도가의 자식으로 명맥을 잇지 못할까 걱정도 했지만, 고향에 돌아온 날 발밑에 펼쳐진 포도밭에선 포화를 견딘 포도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다. 집 마당에는 앙리를 발견한 노부부가 포옹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앙리는 군복을 벗고 다시 농부의 옷을 입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났구나! 살아 돌아온 그날이 새삼 꿈만 같았다. 무심히 해가 뜨고 지듯,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담갔다. 사무치게 그립던 일상이 무르익는 동안, 그해 가을이 깊어갔다.

겨울의 문턱에 이른 어느 날, 앙리는 담근 지 두 달도 안 된 와인을 꺼냈다. 전쟁터를 떠도는 동안 숱하게 맛보고 싶었던 와인이었다. 와인이 보급되긴 했지만 어디 고향의 맛에 비할 수 있을까. 가볍게 멋을 낸 옷차림으로 가족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11월의 마을잔치가 이제 막 시작됐다.

앙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조르주 뒤뵈프(Georges Duboeuf). 푸이 퓌이세(Pouily Fuisse)의 가난한 포도밭에서 태어나서 레스토랑에 와인을 자전거로 배달하면서 와인업계에 입문하여 보졸레 누보를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보졸레의 왕으로 불리는 그는 와인박물관도 만들었다(김준철 저, ‘와인’ 참조). 조르주 뒤뵈프 홈페이지 캡처
조르주 뒤뵈프(Georges Duboeuf). 푸이 퓌이세(Pouily Fuisse)의 가난한 포도밭에서 태어나서 레스토랑에 와인을 자전거로 배달하면서 와인업계에 입문하여 보졸레 누보를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보졸레의 왕으로 불리는 그는 와인박물관도 만들었다(김준철 저, ‘와인’ 참조). 조르주 뒤뵈프 홈페이지 캡처

2차 대전 당시 보졸레에서 가까운 도시, 리옹에는 파리에서 피란을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늦가을 피란지에서 햇와인을 맛본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가 그 맛을 추억했다고 한다. 얼마 안 가 파리와 리옹의 비스트로에선 보졸레 햇와인이 없어서 못팔 정도가 된다. 맛의 유행이란 얼마나 거침없던가. 1951년 11월 13일이 되자 보졸레의 마을잔치가 마침내 프랑스의 공식 와인 축제로 열렸다.

보졸레 햇와인, 즉 보졸레누보의 전도사 조르주 뒤뵈프는 “바로 만들어 신선하게 마시는 와인”을 장점으로 부각시켜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의 덕택으로 보졸레누보 축제는 전 세계에 알려졌고, 1985년 프랑스 정부는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0시를 보졸레누보 판매 개시일로 정했다.

보졸레누보는 보졸레와 보졸레 빌라주 등급으로 출시된다. 누보와 프리뫼르로 구분하여 유통한다. 왼쪽부터 조르주 뒤뵈프 보졸레누보(Georges Duboeuf Beaujolais Nouveau), 조르주 뒤뵈프 보졸레누보 로제(Georges Duboeuf Beaujolais Nouveau Rose), 조르주 뒤뵈프 보졸레 빌라주 누보(Georges Duboeuf Beaujolais villages Nouveau), 루이 자도 보졸레 빌라주 프리뫼르(Louis Jadot Beaujolais villages Primeur).
보졸레누보는 보졸레와 보졸레 빌라주 등급으로 출시된다. 누보와 프리뫼르로 구분하여 유통한다. 왼쪽부터 조르주 뒤뵈프 보졸레누보(Georges Duboeuf Beaujolais Nouveau), 조르주 뒤뵈프 보졸레누보 로제(Georges Duboeuf Beaujolais Nouveau Rose), 조르주 뒤뵈프 보졸레 빌라주 누보(Georges Duboeuf Beaujolais villages Nouveau), 루이 자도 보졸레 빌라주 프리뫼르(Louis Jadot Beaujolais villages Primeur).

보졸레누보는 보졸레와 보졸레빌라주 등급으로 나오는데, 적포도 품종인 가메로 탄산 침용 방식으로 만든다. 밀폐된 발효조에 포도를 송이째 넣고 탄산가스를 가득 채워 발효시킨 뒤 일반 양조법으로 4~6주 동안 후딱 만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양조하면 떫은맛과 신맛은 적고, 딸기와 크렌베리 등 과일 향이 짙은 상큼한 와인이 된다.

보졸레 햇와인은 누보와 프리뫼르로 구분되어 유통된다. 누보는 출시한 다음 해 수확일인 8월 31일까지, 프리뫼르는 출시한 다음 해 1월 31일까지만 유통한다.

그러니까 바로 내일. 11월 21일 목요일 0시에 축제가 시작된다.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환성이 들리는 듯하다. 르 보졸레누보 에 따리베 (‘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 보졸레누보가 막 도착했어요!)

보졸레누보 2019 포스터, 보졸레와인협회 홈페이지 캡처
보졸레누보 2019 포스터, 보졸레와인협회 홈페이지 캡처

서두에 김장 얘기를 꺼낸 김에 천기를 누설하자면, 보졸레누보는 수육과 무척 잘 어울린다. 아직 김장 전이라면 한번 맛보시라.

시대의창 대표ㆍ와인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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