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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휴대하면 간첩? 美 방첩대 자료로 엿본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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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휴대하면 간첩? 美 방첩대 자료로 엿본 현대사

입력
2019.11.15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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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속으로 2012년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에 파견 근무하면서 한국 현대사와 관련한 사진을 발굴해 책으로 엮었다. 사진은 1950년 11월 22일 함흥 비행장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맨 오른쪽), 이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맨 왼쪽), 제10군 최고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등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김현숙 소령이다. NARA가 보관중인 사진을 저자가 찍었다. 앨피 제공
저자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속으로 2012년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에 파견 근무하면서 한국 현대사와 관련한 사진을 발굴해 책으로 엮었다. 사진은 1950년 11월 22일 함흥 비행장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맨 오른쪽), 이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맨 왼쪽), 제10군 최고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등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김현숙 소령이다. NARA가 보관중인 사진을 저자가 찍었다. 앨피 제공

피카소가 한국 현대사의 한 사건을 그린 그림이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다.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민간인 3만5,000여명이 학살된 신천 학살 사건이 소재다. 캔버스의 왼쪽에는 벌거벗은 아이들과 여성들이, 오른쪽에는 철갑을 쓴 채 성별도, 국적도 알 수 없는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다. 피카소가 발표한 이 그림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북한에서 일어난 학살을 조사하는 계기가 됐다.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냈지만 그림 속 여성의 이미지는 어쩐지 어색하다. 머리를 늘어뜨린 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다. 피카소가 여성성을 강조한 건 의도가 있었을 거다.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부각시켜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저자가 피카소의 그림을 끌어온 이유가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에서 찾아낸 한 여성 전사는 그 같은 고정관념의 이미지를 전복한다. 한국 여군을 창설한 김현숙 소령은 사진 속에서 까만 선글라스에 군용 점퍼를 입고 가죽 장갑을 낀 채 호탕하게 웃고 있다. 그는 “비겁한 사나이는 자성하라”며 “모병을 실시하는 중대한 위란기임에도 일부 비겁한 남자들은 이를 회피 하기 위해 각처를 돌아다니며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경향이 많은 모양”이라고 꾸짖기도 했다(1950년 8월 23일).

김 소령의 일갈이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당시 미군 정보기관은 “한국 고위 공무원의 자제들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미군이나 유엔 등에 취업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연합국 기관의 증명서를 위조, 변조하는 알선업체 단속에도 골머리를 앓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징집을 면하기에 가장 확실한 문서가 미군 방첩대(CIC) 소속이라는 증명서였다고 한다. CIC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인 피난민들이 2사단 포로 집결지에서 짐 수색을 받고 있다. 이들이 별다른 혐의가 없으면 유엔 민사처로 넘겨질 것이다”라는 설명이 적힌 사진. 날짜는 1951년 7월 19일로 돼있다. NARA의 사진을 저자가 카메라로 다시 촬영한 것이다. 앨피 제공
“한국인 피난민들이 2사단 포로 집결지에서 짐 수색을 받고 있다. 이들이 별다른 혐의가 없으면 유엔 민사처로 넘겨질 것이다”라는 설명이 적힌 사진. 날짜는 1951년 7월 19일로 돼있다. NARA의 사진을 저자가 카메라로 다시 촬영한 것이다. 앨피 제공

이 책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속으로 2012년 NARA에 파견 근무를 떠났던 저자가 이곳의 사진자료실에 살다시피 하며 모은 풍부하고도 귀한 사진들로 구성한 현대사책이다. 특히 미군정기(1945~48)에 한국에서 활동한 CIC의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만들어진 비밀 부대의 후신인 CIC의 임무는 정보 수집과 요인 사찰, 간첩 색출, 정치공작이었는데 한국에선 그 중에서도 간첩 색출에 집중했다.

한국전쟁 당시 방첩활동을 총괄한 미군 제308 방첩파견대는 ‘간첩 표식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실소가 나오는 항목이 여럿이다. ‘개인 휴대 알루미늄 숟가락, 부러진 숟가락, 나무 숟가락을 휴대한 자’ ‘손이나 몸에 새긴 점’ ‘여성 간첩들은 메시지를 머리의 형태로 전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별로 여섯 개의 검은 콩을 휴대’ 등이다. 저자는 “방첩파견대 하나가 걸러 보낸 피난민(간첩 의심자)의 수가 30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지만, 이 틈에서 굵직한 거물 간첩을 포획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NARA에서 찾은 사진 한 장이 실상을 가늠케 한다. 사진에서 미 헌병은 아이를 업은 아낙과 촌로의 보따리 짐을 풀어 수색한다. 다른 헌병은 ‘prisoner of war(전쟁포로)’라고 적힌 서류를 들고 있어, 이들을 간첩으로 결론 낸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추측했다. 유엔군 장교나 한국 경찰이 피난민들을 1차 조사한 뒤 정밀심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CIC 심문소로 보내는 식이었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이것이다. “CIC의 활동이 대한민국 반공 체제 구축에 적절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 그럭저럭 이해된다면 좋겠다.” 대한민국 역사의 99.99%를 만든 건 USA라는 저자의 말엔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이념으로 갈라지는 남남 갈등의 책임은 그 말이 맞을 테다.

첩보 한국 현대사

고지훈 지음

앨피 발행ㆍ410쪽ㆍ1만6,800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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