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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에 올인하다가 ‘미쳤다’는 말도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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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에 올인하다가 ‘미쳤다’는 말도 들었죠”

입력
2019.11.1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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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기자 상원텍스타일 대표

류기자 상원텍스타일 대표가 공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류기자 상원텍스타일 대표가 공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류기자(오른쪽)상원텍스타일 대표가 남편 김성영 대표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류기자(오른쪽)상원텍스타일 대표가 남편 김성영 대표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이 제 사업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류기자(59) 상원텍스타일 대표는 결혼 후에 사업을 시작했다. 무작정 사업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결혼 전,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회사를 만들어 하던 일을 재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1979년에 현재 삼성창조경제센터 자리에 있던 제일모직에 입사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섬유 쪽 일을 배웠다. 20대 중반에 제일모직을 나와 원단 유통업체로 들어갔다. 28살에는 무역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원단 공장에서 원단을 사서 염색 등의 가공을 거친 후 의류 공장 등에 넘기거나 외국으로 수출하는 일이었다.

“프라이드를 타고 대구와 경북을 누비고 다녔어요. 이런 이력 덕에 사업을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거래 업체들이 갑자기 거래 중단을 선언한 이유

2001년, 같은 업계에 종사하던 남편이 류 대표 회사에 합류했다. 남편과 함께한 뒤로 전성기가 찾아왔다.

“남편과 저, 경리 한명, 이렇게 셋이 의기투합해 100억 매출을 올렸어요. 저와 남편의 인맥과 정보력이 좋았고, 경리도 일을 잘 했어요. 입을 댈 데가 없었죠. 그 덕에 상승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다.”

2008년 제조업으로 돌아섰다. 하청을 받던 공장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이 계기였다. 공장주들이 “중간 업체가 없어도 된다”면서 주문을 거절했다. 직접 제조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독립선언을 했던 업체들은 얼마 안 가 규모가 줄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기업마다 각자의 역할일 있는데, 우리 같은 무역회사가 하는 일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동안 다양한 제조업체와 거래하면서 아쉽게 느꼈던 점을 보완하는 식으로 공장을 구성했다. 우선 새 기계만 샀다. 품질을 보증하려면 새 기계가 아니면 안 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사업가들 사이에서 “제정신이 아니다”는 말까지 나왔다. 당시 섬유기계가 헐값으로 중국 등으로 넘어갈 때였다. 중고로 샀으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공장을 구성할 수 있을 거였다.

기계를 들인 후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갔다.

“제일모직 등에서 직원으로 일할 때는 맡은 분야만 잘해도 칭찬을 들었지만 사장은 전반적인 과정을 알아야 문제없이 공장을 돌릴 수 있습니다. 공장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사장이 기술자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후에도 일을 했다. 직원이 별다른 조짐 없이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48시간 동안 잠을 안 자고 일한 적도 있었다. 소음이 난다는 민원 때문에 한 달 동안 공장을 멈추기도 했다. 그렇게 3년 동안 기반을 다졌고, 매출도 50억 대로 올라섰다.

직원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한 자리에 모였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직원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한 자리에 모였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열심히 일한 후의 성취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

2010년대 초반에 제조업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등산복, 골프복 등이 인기를 끌면서 기능성 원단 수요가 폭증한 까닭이었다. 류 대표는 남들보다 한발 일찍 기능성 섬유에 뛰어들었다. 정보가 빨랐고, 또 민감하게 반응한 덕분이었다.

“제조업만 파고들면 요긴한 정보를 접해도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저 막연하게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와 흐름을 읽는 눈이 가장 중요합니다. 상원은 미리 보고 준비한 덕에 기능성 섬유 주문이 갑작스레 밀려 들어올 때 곧장 수요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정보력으로 피할 수 없는 파고는 품질로 극복했다. 그렇게 하청 업체들의 거래 중지로 시작한 사업이 탄탄대로를 유지하는 것도 품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아직 제조가 어렵다”고 했다.

“중간 납품을 담당하거나 무역을 할 때는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그만이었는데, 제조업은 다릅니다. 오늘 못 만들면 그 물량은 영원히 우리 몫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치열하기 짝이 없는 분야입니다.”

동시에 그 치열함이 제조업의 매력이라고 했다. 류 대표는 “정주영 회장이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하고 나서 먹던 짜장면 한 그릇의 맛을 잊을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밤낮으로 기계를 돌려서 뽑아낸 원단을 트럭에 실을 때 그런 기분이 느껴진다”면서 “열심히 일해서 얻는 성취감과 포만감은 제조업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에 나가면 고급 의류 샵에서 우리 공장에서 뽑아낸 원단으로 만든 옷을 마주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던 피붙이를 만난 기분이 듭니다. 그것도 이 일을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하하!”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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