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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보다, 경제를 읽다] 경기침체의 불안이 없었다면, 고갱은 타히티의 순수를 탐했을까

입력
2019.11.16 04:4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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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폴 고갱의 인생 역정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1897), 미국 보스턴미술관, 139.1㎝×374.6㎝
폴 고갱,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1897), 미국 보스턴미술관, 139.1㎝×374.6㎝

회화는 매력적인 시각예술이다. 글로는 책 한 권을 읽어야 알게 되는 내용을, 단 하나의 그림으로 핵심까지 보여주는 경우를 때로 경험한다.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장식적인 구도를 통해서 인간이 처한 환경적 조건과 삶 자체를 단번에 우리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학창 시절에 우연히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그림 속에서 즉시 고갱의 색채를 보았었다. 그만큼 고갱의 원시적 색감은 강렬하다.

예술가들은 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작품으로 남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보여주기도 하고, 주위의 환경이나 상황에 영향을 받은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표현해내기도 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보면서 작가의 삶과 그를 둘러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고갱의 치열한 삶과 열정은 문호 서머셋 모옴(Sommerset Maugham)이 소설로 형상화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 pence)다.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고갱을 신화적 존재로 만들어서 오히려 그의 진면목을 못 보게 만든다는 비평도 있다.

 ◇파리 주식브로커를 덮친 금융위기 

고갱은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특이한 삶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생 동안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세계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그림 그리는 작업 역시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시작하였다. 젊지 않은 나이에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이, 미술에 대한 열망과 흥미로 예술가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고갱은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를 알게 되고 1880년 인상파전에 참가하면서 화단에 입문하게 된다. 풍경화 위주로 출발한 그의 초기 회화는 전시회에 출품되거나 살롱에 입선되면서 차츰 인정 받았다.

당시 고갱의 직업은 금융거래소 직원이었다. 30대 초반까지 파리에서 증권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그림을 수집하기도 하면서 경제적으로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던 그에게 그림은 일종의 부업과 같았다.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것은 경제적 상황의 반전, 갑자기 들이닥친 프랑스 금융시장의 붕괴였다. 1882년 11월 프랑스 주식시장은 대폭락장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요새로 말하면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쯤 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급격한 경기침체로 말미암아 주식거래인인 고갱의 직업도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갱의 인생 역정은 화가의 길로 바뀌게 된다. 그는 선배 화가 피사로와 의논하여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금융회사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게 된다. 고갱 자신이 이때가 아니면 전문화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오직 생업을 위한 전향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삶이 일대 전환을 맞은 건 분명했다. 경제적 상황의 변화가 개인의 직업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위기 속 변모 거듭한 자본주의 

경제사적으로 보면 유럽에서 1873~96년 기간은 소위 ‘장기대침체 시대’(Long Depression)였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 1882년 파리에서 각각 주식 폭락 사태가 일어났고 뒤이어 경기침체와 물가 하락이 지속되었다. 당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해 노동자 문제와 빈부격차가 심각해지면서 유럽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난립하게 되었다. 1873년 이래 20여 년간 지속된 ‘대불황’은 이전의 불황에 비해 새로운 특징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종래의 경기 순환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진행되었다는 점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선진 산업국가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경제가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실업 악화, 자본 집중 심화, 파업 확산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이전의 소위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서도 경기순환(Business cycle)에 의해서 호황기와 불황기가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경기변동을 겪었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산업자본주의가 발흥하기 이전 상업자본주의 시대에도 경기 부침 현상은 나타났고 때로는 가격 폭등 같은 버블 현상도 있었다. 가령, 국제교역이 번성했던 1630년대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튤립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여 튤립 뿌리 하나가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비쌌다. 경제사에서는 이를 ‘튤립 버블’이라고 일컫는데, 현대의 부동산 버블현상과 구조적 특징은 같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 주식시장의 대폭락에 의해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촉발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몰락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J. M. Keynes)는 정부의 적극적인 금융ㆍ재정정책(monetary & fiscal policies)을 대책으로 제시하였다. 자본주의 체제가 ‘수정자본주의’ 체제로 변하게 된 계기였다.

오늘날의 경제위기는 1929년 대공황 때만큼 심각한가? 그 때와 지금의 세계 경제는 구조적 특징부터 많이 다르다. 세계는 보다 더 국제화됐고 금융시장은 전세계적으로 자유화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해서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의 벤 버냉키(Ben Bernanke) 의장은 단호한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경제 붕괴가 대공황 때보다 더 심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버냉키 의장은 이자율을 제로 상태까지 내리고 달러를 무제한적으로 시장에 푸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택했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케인지언(Keynsian) 처방을 내린 셈이다.

 ◇순수한 원시사회에서 길어낸 대작 

프랑스 경기침체로 금융회사 직원에서 실업자로 전락한 고갱은 전업화가로 변신하였지만 화가로서 살아가기란 녹록지 않았다. 고갱은 1886년에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 브르타뉴의 퐁타방(Pont Aven)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인상파 화풍을 버리고 특유의 야수파적 색감과 장식적 화법을 지향하여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그는 1888년 미술거래상이었던 반 고흐의 동생 테오(Theo)의 권유로 남프랑스 아를(Arles)에서 고흐와 함께 1년 정도 생활하다가 결별한다. 이때의 스토리는 1956년 영화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에 잘 드러나 있다.(고흐 역은 커크 더글러스, 고갱 역은 앤서니 퀸이 맡았다. 퀸은 이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산업화된 프랑스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원시적 자연을 동경하던 고갱은 결국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Tahiti) 섬으로 향한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전파로 산업화와 도시집중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시는 자본주의의 냉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도시로 모여들면서 실업자는 증가하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었다. 이런 도시화에 적응할 수 없었던 고갱은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원시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들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당시 타히티는 그의 이상과 달리 척박하고 쉽게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는 2년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1895년 다시 타히티로 돌아온 고갱은 파리에서 겪었던 패배감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는데 이때 마지막 유언처럼 그린 그림이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1897)이다. 이 그림은 마치 베토벤이 남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와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된 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타히티 섬으로 건너온 고갱의 그림이 물질주의에 물들지 않은 원주민의 순수한 인간성과 열대의 강렬한 색채로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주식시장에 급격한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평생 주식중개업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예술사에서 흥미로운 아이러니 중의 하나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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