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강릉국제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이끈 김동호 조직위원장.

아름다운 바다와 산, 그윽한 커피 향을 품은 강릉이 ‘영화의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8일부터 14일까지 첫 선을 보인 강릉국제영화제는 영화인들과 관객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강릉의 자연과 문화뿐 아니라,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허난설헌, 허균, 신봉승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문향’의 자부심을 영화제에 잘 녹여낸 덕분이다. 문학과 영화의 만남을 주제로, 1960~70년대 문예 영화 특별전과 소설가 최인호 회고전,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가수 밥 딜런을 조명하는 특별전 등이 열려 큰 호응을 얻었다. 시인 정호승ㆍ장석남, 소설가 김도연, 동화작가 양연주도 참여해 관객을 만났다.

그 뒤엔 김동호(82) 강릉영화제 조직위원장이 있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설하고 15년간 집행위원장을 맡아 부산을 아시아 영화 중심지로 키워냈던 그가 강릉영화제 수장이 돼 현장으로 돌아왔다. 영화진흥공사 사장과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 문화부 차관,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던 공직 생활이 인생 1기라면, 부산영화제와 함께한 시간이 인생 2기, 그리고 강릉에서 세 번째 영화 인생이 시작되고 있다. 개막 다음날인 9일 강릉 한 호텔에서 만난 김 위원장은 “문학이라는 기조를 잘 살려 특성화된 영화제로 키워 가고 싶다”고 말했다.

8일 오후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자문위원장인 배우 안성기(왼쪽부터)와 김동호 조직위원장, 김한근 강릉시장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연합뉴스

개막식부터 남달랐다. 최초의 여성 감독인 알리스 기 블라쉐가 오 헨리의 동명 소설로 만든 흑백 무성 영화 ‘마지막 잎새’가 스크린에 흐르는 가운데 강릉시립교향악단의 연주가 더해진 개막 공연과 개막작 ‘감쪽 같은 그녀’ 상영이 전부였다.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을 소개하는 시간은 물론 개막 선언조차 없었다. “전 세계 어느 영화제를 가도 개막 선언을 하는 곳이 없어요. 관료제가 강한 일본이나 중국에서나 있는 일이죠. 부산영화제 출범 당시 개막 선언을 만든 당사자로서 저의 책임도 있으니 그것만큼은 반드시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강릉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자마자 김한근 강릉시장에게 선언을 했어요. 저와 시장을 포함해 누구도 무대에 오를 수 없다고요.”

처음엔 영화제 자문 역할만 맡을 생각이었지만, 집까지 찾아와 삼고초려하는 강릉시장의 열의에 개막까지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은 8월 중순 결국 마음을 돌렸다. “주변에서는 많이 말렸어요. 그간 쌓아 온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가능성을 봤어요. 문화 행사를 치르기에 적정한 20만 인구에 동계올림픽을 치르며 인프라도 갖춰져 있었고 시민의식도 높았습니다.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승부욕이 생기더군요.”

조직위원장을 맡자마자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일본의 영화 대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초청했다. 중국 지아장커 감독과 이창동ㆍ이명세ㆍ민규동 감독, 배우 전도연ㆍ박정자ㆍ손숙ㆍ윤석화ㆍ김래원 등 수많은 영화인이 기꺼이 강릉을 찾았다. ‘인맥왕’ 김 위원장의 힘이었다. 전 세계 영화제 집행위원장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윌프레드 웡 홍콩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과 히사마츠 다케오 도쿄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키릴 라즐로고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사무엘 하미에르 뉴욕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10여명이 국제 포럼에 참석해 영화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주제로 고민을 나눴다. 김 위원장은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이런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매년 꾸준히 포럼을 열어서 영화제의 다보스포럼으로 키워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제1회 강릉국제영화제 둘째 날인 9일 열린 ‘20+80: 21세기 국제영화제의 회고와 전망’ 포럼에 전 세계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모여서 경험과 고민을 나누고 있다. 강릉국제영화제 제공

김 위원장은 얼마 전 경기 광주에 자택을 새로 지어 거처를 옮겼다. 서재에 스크린과 음향 시설을 갖춰 놓고 매달 초 동네 이웃들을 초대해 영화를 함께 관람한다. 지난달에는 ‘최후의 증인’ 복원판을 상영한 뒤 연출자 이두용 감독과 대화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에겐 삶이 곧 영화다. 강릉영화제도 이제 막 첫 발을 뗐지만 김 위원장은 벌써 수년 앞을 내다보고 있다. 내년에는 장편영화로까지 제작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경쟁분야를 신설해 신진 감독과 작가를 발굴할 계획이다. “강릉을 중심으로 강원 영동 지역을 영화 산업 도시로 키워가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김 위원장의 얼굴에 활력과 열기가 가득했다. 이젠 해외 영화제 출장도 잦아질 테다. “집에서 내 놓은 사람이 된 지는 이미 오래됐어요(웃음). 그래도 이 나이에 새롭게 시작하니 즐겁고 행복합니다.”

강릉=글ㆍ사진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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