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19)] 부모님과 호주 자유여행 2편
두 분은 ‘꽃 길만 걸으세요’라고 하고 싶었으나 막내딸 가이드를 잘못 만나 궂은 길도 걸어야 했다.

붕붕 떠다니는 생각과 정보는 ‘텍스트로 남겨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기록해야 했다. 부모님을 한국에서 호주 땅으로 무사히 부르는 것이 급선무요, 셋의 여행이 삐거덕거리지 않으려면 최소한 계획이란 게 필요했다. 이에 비하면 탕탕과의 여행은 게으름과 충동의 연속이었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좋으면 더 갔다. 본능에 충실했던 이유는 우리의 감정이 여행지에서 어떻게 발현할지 모른다는 확신에서였다. 이런 무계획으로 부모님을 모실 순 없었다. 계획서를 짜면서 여행에도 성공과 실패가 있을 수 있음을 처음으로 느꼈다. 한마디로 바짝 ‘쫄았던’ 것이다.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나 보다. 파워포인트(PPT)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대학생이 들으면 우습겠지만, 나도 진작부터 PPT를 사용해왔다. 이번 부모님과의 여행계획서는 지금까지 작성한 PPT 중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이다. 풍성한 자료를 첨부해 설명을 덧붙이고 게다가 사랑까지 듬뿍 담았다. 총 5개 장으로 구분했다.

chapter 1. 백 번 두드려도 모자란 돌다리, 기본 사항
스티브 잡스는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날 위해 무엇이 담겨 있는가?”라고 했다. 그건 사랑이었다. 꾸밈없이 단출했지만.
세관 신고까지 포함된 입국 카드. 앞ㆍ뒷면을 꽉 채워야 한다. 외국 항공사를 탈 부모님은 영문 카드를 받을 예정이라 미리 모든 걸 대필한 샘플을 만들었다.

이것저것 준비물에 정신이 팔리면 정작 핵심을 빠뜨릴 때가 있다. 국경을 넘으려면 여권과 잃어버릴 상황을 고려한 여권 사본이 필요하다. 호주는 이에 더해 관광비자(ETA) 확보도 필수다. 일반적으로 여행사를 통해 항공권을 발급하면 무료로 비자를 만들 수 있다. 이 경우가 아니라면 공식 비자 발급 홈페이지를 통하는 것(20호주달러, 약 1만6,000원)보다 마이리얼트립(myrealtrip) 앱에서 1만원 이내로 따로 신청하는 게 이득이다. 입국 심사대에서 컴퓨터로 확인하기 때문에 따로 비자를 증명할 필요는 없으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비자 승인 내역 사본도 첨부했다. 더불어 입국 심사 때 검사할 수도 있는 항공권 사본도 필요했다.

기본 사항에서 가장 높은 허들이라면 호주 입국 카드다. 비상 연락망까지 상세히 써야 하는 이 카드는 부모님 정보까지 모두 기재해 샘플이 아닌 대필 수준으로 만들었다. 입국 카드의 ‘신고’ 목록에 있는 품목은 부디 두고 오시라 신신당부했다. 특히 음식물은 호주의 치 떨리는 짐 검사를 통과하기 어렵다. 김치와 햇반은 현지에서 구해주겠노라 약속했다. 상비약을 비롯해 연세 때문에 복용하는 필수 약이 문제다. 미리 영문 처방전을 발급받도록 권고했다. 계획서를 작성하면서 내내 떠나지 않던 단어는 한 가지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만약?’

chapter 2. 환승은 어떻게? 짐 검사나 티켓 발권 없이 ‘처음처럼’

모르면 두려워진다. 부모님에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두려움은 환승이었다. 사실 환승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장시간 비행으로 누적된 피로를 풀 수도 있고, 면세 지역에서나마 다른 국가를 맛볼 기회도 된다. 무엇보다 비용이 절약된다. 두 분에게 환승을 괴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선 익숙함으로 대치해야 했다.

“처음 보딩패스를 받고 게이트를 찾아가잖아. 그거랑 똑같아. 갈아타는 공항에 내려서 ‘International transfer(국제선 환승)’ 화살표를 따라간 뒤 인천공항에 처럼 탑승 게이트를 찾으면 돼. 짐을 찾거나 티켓을 따로 끊을 필요 없어.”

환승할 경우 받는 두 장의 탑승권. 가끔 탑승권 순서를 착각해 잘못 착석하는 경우가 있다. 나처럼.
환승할 비행기를 찾으러 가는 열쇠는 이 타임테이블 전광판에 있다. 지연ㆍ변경 모두 여기에 답이 있다.

환승 시 주의점은 탑승 게이트가 변경되는 경우다. 즉, 인천공항에서 발권받은 퍼스행 항공권에 적힌 게이트 번호가 환승 공항에서 바뀌는 상황이다. 가장 정확한 게이트 번호는 운항 정보를 나열한 타임테이블 전광판에 있다. 게이트부터 확인한 후 면세점 구경을 권했다. 2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비행기를 놓치는 일은 없을 거라 위안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탑승권를 보이면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영문도 추가했다.

“제 부모님에게 몇 번 게이트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당신에게 행운이 있을 거예요.” 퍼스의 한 식탁에서 난 얼마나 많은 환승 시뮬레이션을 했던가! 멀미가 났다.

chapter 3. 짐 검사 해당 품목은 빼세요, 입국 심사 완결판
퍼스의 자동 입국 심사대. 셀프로 했다가 거부당하면 별도로 빠르게 심사받는 줄이 있다.

퍼스로 입국하면 한국인은 입국 심사관이 없는 자동 입국 심사대를 거칠 수 있다. 부모님에겐 익숙한 길을 권했다. 줄을 서서 여권 심사를 받고, 그 후 다른 심사관으로부터 간단한 질문을 받을 수 있음을 예고했다. 영어로 물을 것이니 예상 답안을 영어로 썼다. 호주 여행을 하다가 인상이 깊어 부모님을 초대했으며, 10일간 세 도시를 함께 여행할 예정이라 적었다. 두 분에게 휴대전화의 번역기 앱 사용법을 알려주긴 했으나 긴장한 상황에선 머리가 하얘지는 법이다. 추가 질문이 있을 상황을 고려해 나의 휴대전화 번호도 적었다. 부모님은 입국심사대 직원에게 아마 웃으며 이 문서를 내보일 것이다.

이후 ‘짐만 찾으면 끝이다’라 생각하기 쉽지만, 호주에선 아니다. 깐깐한 짐 검사가 남았다. 짐을 찾아 입국장 대합실로 나가기 전 백이면 백 짐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퍼스 공항엔 세 곳의 출구가 있다. 좌측과 중간, 그리고 우측이다. 중간은 검사 없이 무사 통과자에게만 해당되는 행운의 출구다. 우측은 두 마리의 특수 수색견의 검사를 받은 후 나간다. 최악은 좌측이다. 당신의 짐이 모두 봉인 해제(?)된다. ‘샅샅이’ 뒤지기로 전 세계에 소문났다. 흡연자가 반입 허용(담배 한 갑과 한 개비라도 핀 다른 한 갑) 이상을 소유했다면 모멸감(그것도 몰랐냐?)까지 감수해야 한다. 이와 함께 단순 폐기가 아닌 관세에 벌금까지 맞을 수 있다. 징역형이나 비자 취소의 엄포도 준다. 비흡연자이지만 부모님도 좌측이 걸릴 경우 당연히 입국이 지연된다. 렌터카로 모실 예정이기에 이럴 경우 무시무시한 주차비도 걱정이다. 중간 출구는 꿈도 안 꿨다. 그저 좌측에만 걸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chapter 4. 셋이서 세 도시를 여행하는 법

두 분이 호주를 방문하는 시기는 공교롭게도 현지의 방학 시즌, 중국의 국경절과 겹쳤다. 덕분에 볼거리가 풍성해졌지만, 예약해야 할 것도 많았다. 세 도시 여행 계획은 두 분의 컨디션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는 점을 감안했다. 반드시 그날밖에 이용할 수 없는 예약은 하루에 하나로만 정했다. 이 지침은 사실 부모님보다 가이드인 나를 위한 것이었다. 기억이란 녀석은 언제나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야매’ 가이드의 사전 조사로는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던 까닭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알려진 ‘쿼카’가 실존하는지, 서호주의 로트네스트 섬에서 확인했다. 웃고 있었다.
시드니 외곽 블루마운틴 국립공원의 핵심은 놀이와 트래킹, 풍경 모두 지루하지 않게 섞여 있다는 데 있다.
멜버른은 하루에 사계절을 가진 도시로 유명하다. 계절에 따라 달달 떨지 않도록 외투도 신경 쓸 것.
회오리바람으로 피로를 감내해야 하는 그레이트오션 투어. 여정 중간에 끼워 넣는 게 좋다.

여행 목적지 선택은 대중성에 걸었다. 실패 확률이 적은 안전지대 중심이다. 서호주는 퍼스 시내를 비롯해 프리맨틀과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를 주축으로 기획했다. 시드니에선 잠시 가이드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한국인 가이드가 주관하는 무료 워킹투어(by 머뭄투어)를 신청하고, 외곽으로는 블루마운틴 국립공원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멜버른은 무료 트램으로 시내 구경을 쏠쏠히 하고, 출국 전날 낙조까지 볼 수 있는 그레이트오션 투어를 신청했다. 예약한 바우처는 모두 별도로 프린트했다. 밥과 김치로 한평생을 살아온 두 분을 위해 한인 식당과 마트 정보도 빠뜨리지 않았다. 현지 음식 추종자인 나에겐 매우 고되고 중대한 미션이었다.

chapter 5. 집으로 가는 길은 먼 법이 없다

입국 시 환승 경험이 쌓였을 테니, 출국 절차는 간단히 다뤘다. 다만, 환승하는 나라가 한국인에겐 참 낯설게 느껴지는 브루나이였다. 이 나라의 강점이 있다. 국적기인 로열브루나이항공의 서비스가 우수한 데다 환승하는 반다르스리브가완 공항이 손바닥만하다는 거다. 다소 헤매더라도 거기서 거기다. 인천행 비행기가 출발할 시각이면 함께 출국하는 한국인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여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쉽다.

혹시 빠뜨린 게 없을까? 잠자리에 들어서도 생각날 때마다 메모하고 보충했다. 여행 계획서는 두 분이 한국을 떠나기 일주일 전 완료됐다. 다른 가족과 합작해 계획서와 사본, 각종 바우처를 스프링 제본하고, 부모님은 철 지난 공부에 돌입했다. 왜 언제나 끝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들이닥치는 걸까. 여전히 준비 안 된 기말고사를 앞둔 심정이었다. 어쩌면 가족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없었다면 허무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뿌리다의 부모이고 싶다.” 무한한 당근이자 잘하지 않을 수 없는 채찍이기도 했다.

*부모님과의 서호주 여행 편으로 이어집니다.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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