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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ㆍ서독, 정권 교체돼도 교류 지속… 한국, 정권마다 정책 뒤집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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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ㆍ서독, 정권 교체돼도 교류 지속… 한국, 정권마다 정책 뒤집기 문제”

입력
2019.11.11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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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하> 통일 독일이 남북에 주는 교훈

 동ㆍ서독 ‘접근을 통한 변화’ 20년간 지속… 南도 대북정책 일관성 추진해야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 베를린 베르나우어 거리에 조성된 ‘베를린 장벽 메모리얼’ 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젊은 독일 시민들이 보존된 콘크리트 장벽에 꽃을 꽂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 베를린 베르나우어 거리에 조성된 ‘베를린 장벽 메모리얼’ 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젊은 독일 시민들이 보존된 콘크리트 장벽에 꽃을 꽂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은 한국에게도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통일 선배’인 독일의 역사는 성공 비결인 동시에 반면교사로 삼을 교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1990년 통일 당시 독일은 내전 경험이 없었고, 동구권 붕괴 등 국제 정세도 지금의 한반도 상황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럼에도 독일 통일사와 한반도 문제를 공부해 온 독일과 서울의 많은 전문가들은 독일에게서 배워야 할 점으로 남북한의 교류ㆍ협력의 증진과 북한에 대한 점진적인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6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가진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가 인터뷰 중 질문지를 살펴보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지난 6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가진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가 인터뷰 중 질문지를 살펴보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6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기본 원칙인 ‘접근을 통한 변화’는 남북 관계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969년 정권을 잡은 사회민주당(SPD)의 브란트 총리는 동독을 포함한 동구권 전체를 상대로 ‘화해를 통한 변화’, 즉 대화와 군비축소, 평화 노선을 기반으로 교류 확대 정책을 실시했다. 정 대사는 “꾸준한 접근 노력을 통해 남북 간 상호의존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장 겸 한국학연구소장인 이은정 교수가 지난 6일 베를린자유대학 내 한국학연구소에서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장 겸 한국학연구소장인 이은정 교수가 지난 6일 베를린자유대학 내 한국학연구소에서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장인 이은정 교수도 브란트 총리의 서베를린 시장 당시 일화를 언급하며 교류 증진을 강조했다. 그는 옛 소련의 쿠바 핵미사일 배치로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로 냉전의 정점에 있었던 지난 1963년 당시 브란트 시장이 동독과 통행증 협정에 나섰던 일을 설명하면서 “분단의 고통을 줄일 방법이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차례에 걸친 담판 끝에 체결된 이 협정 덕에 120만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은 헤어졌던 동베를린의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독일 한스자이델 재단의 한국 사무소 대표인 베른하르트 젤리거 박사가 지난 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마친 후 사무실 내에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서울=최나실 기자
독일 한스자이델 재단의 한국 사무소 대표인 베른하르트 젤리거 박사가 지난 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마친 후 사무실 내에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서울=최나실 기자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는 “남북한이 어떤 주제로든 서로 알아갈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라며 “(북한 주민을) 사람 대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서독은 분단 시기에도 우편ㆍ소포 교류 등이 지속됐고, 서독 학생들이 동독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면서 “중국 같은 제3국 중립 지대에서 과학 세미나를 열고 남북한 사람들이 모여 교류를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물론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앞서 1950~60년대 기독민주당(CDU)의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가 추진한 ‘서방정책’과 ‘힘의 우위 정책’이 기반이 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일각에서는 나온다. 서독이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서독ㆍ서방이 경제력 등의 측면에서 동독ㆍ소련에 비해 우위에 있었던 것이 통일에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 전날인 8일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통행 검문소 역할을 한 브란덴부르크문 앞 하늘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리본 전시 작품이 설치돼 있다. 리본 하늘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가져온 동독 시민들의 평화혁명을 기념하고 통일 독일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시민 3만 명의 메시지가 담겼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 전날인 8일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통행 검문소 역할을 한 브란덴부르크문 앞 하늘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리본 전시 작품이 설치돼 있다. 리본 하늘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가져온 동독 시민들의 평화혁명을 기념하고 통일 독일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시민 3만 명의 메시지가 담겼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다만 사민당 정부에서 1982년 기민당 헬무트 콜 정부로 다시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때도 독일은 교류ㆍ협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게 한국과 다른 점이다. 20여년간 동방정책이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콜 정부가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은 오해”라면서도 “콜 정부 때에는 ‘힘의 우위’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으나, 다만 기존의 교류ㆍ협력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연방의회에서 독한친선의원협회 회장을 지낸 하르트무트 코쉭 전 의원은 이와 관련 “한국의 중대한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 이전 정부의 정책을 전부 바꿔버린다는 데 있다”라며 “장기적이고 큰 틀의 대북ㆍ통일 정책에 대한 초당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 “정치권에서뿐만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통일 정책에 대한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동독 예나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한 동독 전문가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지난 2일 서울 중구의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최나실 기자
동독 예나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한 동독 전문가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지난 2일 서울 중구의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최나실 기자

북한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남한 내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동독에게는 ‘누가 정권을 잡든 서독은 평화적인 선린 정책을 펴겠구나’라는 확신이 있었다”면서 “우리는 그게 안 되다 보니 북한과 오해와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남한이 일관된 대북 정책을 펴면 북한 입장에서 남한은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기 때문에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꿀 가능성도 커진다”고 말했다.

과거 독일 연방의회에서 독한의원친선협회장을 지낸 하르트무트 코쉭 기사당(CSU) 전 연방의원이 지난 7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한 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설명을 하던 중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과거 독일 연방의회에서 독한의원친선협회장을 지낸 하르트무트 코쉭 기사당(CSU) 전 연방의원이 지난 7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한 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설명을 하던 중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전문가들은 남북 양자 관계 개선뿐 아니라, 아데나워의 ‘서방정책’과 브란트의 ‘동방정책’처럼 국제적 접근을 통해 분단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코쉭 전 의원은 “독일도 미국ㆍ소련ㆍ영국ㆍ프랑스 등과의 좋은 관계가 없었다면 통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만남이 의미가 깊다”고 평가했다. 독일은 당시 전승 4개국 동의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외교적 설득에 많은 공을 들였다.

9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한 독일 시민이 독일민주공화국(동독ㆍDDR)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9일 독일 베를린 시내의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한 독일 시민이 독일민주공화국(동독ㆍDDR)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독일 통일 과정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은정 교수는 통일 이전인 1990년 1월 동독 정부의 개방으로 서독의 은행과 기업 등이 동독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동독 주민들이 무방비 상태로 자본의 횡포에 노출됐던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해 7월 동서독 화폐 통합 후 동독의 경제 상황이 파탄 나자 서독 은행들은 위험 부담을 이유로 동독 기업과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고리대출을 내밀었다. 이 교수는 “통일 후 대북 투자 과정에서 국가가 국민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지가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동기 교수는 서독이 동독을 사실상 ‘흡수통일’한 뒤, 동독 내 급격한 체제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동독 나름의 유산과 경험을 존중하거나, 동독 주민들의 상실감을 배려하는 자세가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1989년 반체제 시위를 통해 독일 통일의 흐름을 주도한 동독 주민들이 정작 통일의 혜택과 성과에서 배제되는 일이 벌어졌다”면서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통일 그 이후의 사회 통합 문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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