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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다섯 살에 데뷔… 연기 22년만에 신인상 ‘국민배우’

입력
2019.11.09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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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충무로 간판으로 성장한 아역스타 안성기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영화 '하녀'(1960)에서 여덟 살 안성기(왼쪽 세 번째)가 김진규(맨 왼쪽), 주증녀(왼쪽 두 번째) 등 대선배와 연기하고 있다.
영화 '하녀'(1960)에서 여덟 살 안성기(왼쪽 세 번째)가 김진규(맨 왼쪽), 주증녀(왼쪽 두 번째) 등 대선배와 연기하고 있다.
안성기. 성인 연기자로 활동하던 초기 모습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성기. 성인 연기자로 활동하던 초기 모습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성기(67)의 배우 경력은 초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인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안화영은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으로 서울 동성고 체육교사로 재직했는데, 서울대 연극반 출신의 동문이자 절친한 사이였던 김기영 감독의 말을 듣고 영화제작자로 전업하게 된다. ‘황혼열차’(1957ㆍ김지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를 준비하던 때 김 감독은 적합한 아역배우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중이었는데, 이때 안화영은 아들의 출연을 제안했고, 안성기는 아버지와 동반출연하며 배우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충무로에 아역 배우가 없었어요. 처음엔 직접 전쟁고아를 캐스팅하셨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급한 김에 저를 데려다 썼고, 다행히 촬영이 잘 끝났죠.” 김 감독의 다음 작품 ‘초설’(1958)에서는 김지미의 남동생 역을 맡았고, 연기 잘하는 아역배우로 입소문을 타면서 양주남 감독의 ‘모정’(1958)에서는 조연에 가깝게 비중이 오르게 된다.

‘십대의 반항’(1959)에서는 서울역 앞에서 “놀다 가세요, 쉬었다 가세요”라고 호객행위를 하는 소년 근성 역으로 분했는데, 이때의 연기로 미국 시카고영화제 아역상,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 특별연기상을 수상한다. 70여편의 영화에 얼굴을 내밀던 아역시절의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 볼에 살이 알맞게 오르고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소년”으로 익살스러운 개구쟁이 연기에 일가견을 보였다. 한국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하녀’(1960)에서도 여덟 살 소년이던 안성기의 끼 넘치는 연기를 볼 수 있다.

영화 '얄개전'(1965)에서 안성기(가운데)에서 연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얄개전'(1965)에서 안성기(가운데)에서 연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겹치기 출연해야 했던 아역 전성기 

영화 산업의 부흥기였던 1960년대 당시 배우들의 관행처럼 안성기 역시 다수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으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강대진 감독의 ‘어부들’(1961)에 출연할 때는 강원 속초에서의 로케이션 촬영 일정이 길어지는 바람에 다른 영화사 제작부장이 찾아와 스태프들 보는 앞에서 탁자 위에 칼을 꽂으며 “날 죽여. 어차피 쟤(안성기) 못 데리고 가면 난 죽은 목숨이야”라고 강짜를 놓은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자초’(1962)에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옥희로 유명한 전영선과 함께 연기하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어선 안성기는 ‘얄개전’(1965)과 같은 하이틴 무비에도 출연하는가 하면, 연극무대에도 올라 활동의 폭을 넓혔다. 원로배우 이순재는 “예전에 극단 창립공연을 했다. 그때 안성기가 머리를 빡빡 깎고 와서 했었다. 그 친구 중 3때에 나와 같이 연극을 했다”며 “명아역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 앳된 티를 벗게 되면서 들어오는 출연 섭외는 뜸해지게 되었고, 11년간 쉼 없이 달려온 안성기의 아역 시대는 이성구 감독의 ‘젊은 느티나무’(1968)로 막을 내리게 된다.

안성기에게 경력의 공백기가 찾아왔다. ‘병사와 아가씨들’(1977)로 복귀하기까지 9년 동안, 안성기는 동성고에 다니며 학업에 정진했고,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 진학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었고 한국군 파병이 이뤄지고 있던 당시, 베트남 진출에 뜻이 있었던 안성기는 학군장교 12기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가 소위 임관을 채 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났다. 결국 베트남에 가지 못한 안성기는 포병 소위로 전방에서 근무하다 군 생활을 마치게 되는데, 그랬던 그가 훗날 정지영 감독의 베트남전 영화 ‘하얀 전쟁’(1992)에서 참전용사 출신 소설가 역할로 주연을 맡게 되는 건 기이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제대 후 무역회사에 취직할 생각이었던 안성기는 종전 후 베트남과 한국 간의 교류가 끊어지면서 전공을 살릴 기회를 잃었다. 인생의 진로를 두고 고심에 빠진 끝에 내린 결론은 다시 연기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결국 영화가 떠오르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해온 일이니 나보다 잘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자신감을 가지고 해보자’라고 스스로 암시를 한 거죠.”(씨네21 2017년 4월 12일) 아역 출신 배우들이 성인 연기자로의 변신에 실패하고 활동을 중단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던 상황에서, 연기자 안성기의 역량은 본격적인 시험대 위에 오르게 된다. 현장 경험은 많았지만 정작 영화를 많이 접하지 않았고, 체계적인 연기자 수업을 받지 못한 한계를 느낀 안성기는 1976년 제대 후 2년 동안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한 학기 수강하는가 하면, 프랑스문화원을 드나들며 다양한 영화를 섭렵해나가면서 부족했던 기초를 다져나갔다. 아역 스타의 옛 영광을 떠나 연기자로 거듭나기 위해 치른 성장통의 시간이었다.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안성기는 성인 연기자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안성기는 성인 연기자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성기(왼쪽)는 영화 '만다라'(1981) 등에 출연하며 충무로에서 입지를 다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성기(왼쪽)는 영화 '만다라'(1981) 등에 출연하며 충무로에서 입지를 다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성인 연기자 복귀 후 3년 무명 세월 

세경영화사 전무로 영화 현장에 남아있던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병사와 아가씨들’로 돌아오긴 했지만, 신문기사 몇 줄 난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그 뒤 ‘제 3 공작’(1978), ‘야시’ ‘우요일’(1979) 세 편의 영화에 더 얼굴을 내밀었지만 주목해주는 이는 없다시피 했다. 성인 연기자 안성기의 초반은 참담한 실패였다.

“답답한 시절이었죠. 하지만 좌절하진 않았어요. 대신 매일 저녁엔 원고지를 놓고 시나리오를 썼죠. 몇 년에 걸쳐서 총 네 편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생각해보면 매우 좋았고 중요했던 시간이었어요. 감독님들 만나서 자꾸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부분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고요. 배우로서 자세가 좋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부진의 늪에 빠져있던 그에게 일대 전환점이 되어준 건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1976년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4년간 손발이 묶여 있다가 해금 조치로 막 풀려난 이장호 감독은 중구 서울신문사 근처의 성궁다방을 들락거리며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마침 안성기는 대학 동창들을 만나러 성궁다방에 들른 차였는데 그곳에서 이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하던 배창호 감독과 마주치게 되면서 덕배 역에 캐스팅된다. 그 무렵 농촌문학에 심취해있던 이 감독은 고도성장과 개발의 이면에 버려진 빈곤과 소외의 현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다루는 리얼리즘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방향성은 좀처럼 맞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던 안성기가 평소 추구하던 바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당시 영화배우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식의 사회적 인식이 있었어요. 많이 속상했죠. 평생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데 그런 인식은, 유신시대의 한국영화가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생긴 거죠. 사회 참여적인 영화는 거의 없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거나 순수한 문예영화나 반공영화나 국책영화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10년 넘게 그런 상황이었으니, 영화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거죠.”

영화의 주인공인 덕배와 그의 친구들은 시골에서 상경해 새롭게 개발 중인 강남 쪽에서 각각 짜장면 배달부, 이발소, 여관 허드렛일을 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어간다. 덕배는 그의 말마따나 “참고 살아야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벙어리인 척” 살아가지만, 개발로 터전을 잃은 지역민들이 도시 하층민의 삶으로 내몰리고, 빈부간 격차가 벌어져가는 계급의 현실 속에서 그의 희망과 사랑은 철저히 배신당하고 농락당한다. 권투로 세상을 이겨보겠다며 오뚜기처럼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길 거듭하는 덕배에게서 관객들은 시대의 비극과 도시 소시민으로서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서울 관객 10만명을 동원하고 제19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이 감독의 재기를 알렸고, 안성기에게도 대종상 신인남우상의 영광을 안겼다. 아역으로 데뷔한지 22년만의 신인상이었다.

이후 안성기는 이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1981), ‘낮은 대로 임하소서’(1981), 조세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원세 감독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에 합류해 성숙한 연기자로서의 진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배우 안성기의 재출발을 알리는 힘찬 신호탄이었다. 더 나아가 감독 배창호의 페르소나가 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그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을 기점으로 13편을 배 감독과 함께 했다. 안성기의 전성시대와 함께 본격적인 ‘코리안 뉴웨이브’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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