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제2 출발점’ 서다] <3> 후반기 경제, 이것만은 챙겨라
SKTㆍ카카오 지분 맞교환에도 규제 탓 데이터 활용은 막혀
“R&D 세제지원 등 한시적이라도 기업 혁신 독려 환경 조성을”
“대내외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총력대응이 필요한데 경제이슈를 논의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경제는 버려지고 잊힌 자식인가.”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9월 ‘전국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서 한 이 발언은 문재인 정부 전반기 경제 정책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냉정한 평가다. 전체 수출은 물론이고, 주력 품목인 정보통신기술(ICT) 제품 수출이 11개월 연속 감소한 데다 내수 경기까지 침체되면서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정부는 출범 이후 적폐 청산과 북핵 문제, 조국 사태 등 굵직한 정치 현안에 갇혀 경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골든 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경제ㆍ산업계와의 스킨십을 강화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신속히 없애 민간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제 홀대’는 국정운영 방향을 나타내는 문 대통령의 연설문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빅데이터 분석 전문기업 사이람에 따르면 ‘더불어 잘 사는 경제’를 내세우며 출범한 첫 해, 문 대통령이 연설문에서 가장 많이 쓴 상위 3개 단어는 북한과 일자리, 한반도였다.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에는 한반도, 남북, 혁신이 윗자리를 차지했다. 국정 운영의 중심이 한반도 문제에 쏠려 있었다는 얘기다.
올해 연설문에선 그나마 혁신, 기업, 한반도 등 경제 관련 단어가 가장 많이 쓰였다. 문 대통령은 올해 들어 기업인들과 부쩍 만남을 늘렸고, 최근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생산 현장을 잇따라 방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재계는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대통령의 행보와 달리 기업을 규제하는 정책ㆍ제도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며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계와 소통에 나선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벤트만으론 기업에 적대적이라는 그간의 인식을 뒤집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52시간 근무제 일괄 적용처럼 기업 부담을 높이는 정책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등 먼저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일시적인 관심 갖기에 머물러선 곤란하다”며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투자 부진…잠재성장률 반토막 우려도
경제ㆍ산업계에선 꺼져가는 성장 동력 불씨를 다시 살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규제 개혁이 필요하고 입을 모은다. 민간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저성장이 고착화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정책만으로 경제를 끌고 가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터산업 활성화를 위한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ㆍ신용정보보호법ㆍ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가공할 수 있는 데이터를 많이 확보해야 ICT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지금은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특정인의 데이터인지 알아볼 수 없게 비식별 조치를 하더라도 데이터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일이 고객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최근 SK텔레콤과 카카오가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지분 맞교환을 결정했지만 두 기업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활용하는 건 규제 탓에 불가능하다”며 “혁신 서비스가 나오기 힘든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이경상 본부장은 “책임의 공을 국회로만 돌릴 게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해당 규제 개선이 왜 필요한지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율주행차 역시 수천대가 도로에서 운행 중인 미국과 달리 국내에선 겨우 80여대가 임시 허가를 받아 도로 위를 달리는 상황이다. 자율자동차 주행시험에 관한 규제가 엄격한 탓이다. 축적되는 데이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미래 먹을 거리인 자율주행차 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2030년까지 미래차 경쟁력 1등 국가가 될 것”이란 문 대통령의 말도 자칫 공허한 선언에 그칠 수 있다.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감세정책과 적극적인 산업정책 등으로 민간투자가 늘고 있지만 한국은 정반대”라며 “정부가 민간 투자 걸림돌을 제거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설비와 건설, 지식재산물 투자 금액을 합한 총고정자본형성의 올해 증가율이 한국의 경우 2.4%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3.6%)과 유럽연합(2.4%), 일본(1.9%)의 증가세와는 대조적인 전망치다.
규제의 늪에 갇힌 민간 투자 감소는 미래에 직격탄이다. 대한상의는 현재의 투자 감소 추세가 지속된다면 2020~2024년 한국의 잠재성장률(1.8%)이 그렇지 않을 때(2.3%)보다 크게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부진한 민간투자에 총요소생산성까지 0.6%포인트 하락할 경우 2020~2024년 잠재성장률은 1.2%까지 급락할 것으로 분석했다. 총요소생산성은 경영혁신과 노사관계, 법ㆍ제도 등이 얼마나 생산에 기여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국내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 국내외 투자 발목
합리적인 수준에서 기업 부담을 줄이는 작업 역시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게 경제ㆍ산업계의 바람이다. 정책 집행 속도를 조절하거나 적용 범위를 유연하게 해 기업 의욕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정책 도입 목적까지 달성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홍성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전체 민간 연구개발(R&D)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대기업 R&D의 경우 세액공제율을 1~3%에서 0~2%로 축소해 혁신 기술이 개발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며 “R&D 세제지원을 한시적으로라도 늘려 민간 투자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태윤 교수는 “집중 근로가 필요한 정보기술(IT) 업계는 주52시간 근무제 일괄 적용을 달리 해 고용 부담을 줄이고, 산업재해 방지에 큰 효과가 있다고 보기 힘든 최고경영자(CEO) 처벌 조항도 손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원청업체의 안전조치 소홀로 하도급업체 직원이 사망할 경우 원청업체 CEO가 최대 7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선한 취지’로 도입했지만 국내에만 존재하는 이런 ‘갈라파고스 규제’는 해외기업의 국내 투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좌담회에서 “한국에선 직원 한 명의 문제가 곧 CEO의 리스크가 된다”며 “한국에서 영업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 CEO에겐 매우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맹하경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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