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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공정한 갑질

입력
2019.11.05 04:40
수정
2019.11.10 23:5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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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뉴욕에서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뉴욕에서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요즘 우리 사회 핵심 화두가 ‘공정’이다. 기득권을 가진 ‘갑’의 전횡, 나아가 독식을 막는 게 정부의 급선무가 됐다. 급부상한 분야가 대학 입시다. 인화성 강한 곳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불을 질렀다. “정시(대학수학능력시험)가 수시(학생부종합전형)보다 공정하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반성은 진화 시도다.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낸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직접 ‘불공정 온상 개혁’의 밑작업을 챙겼다고 한다.

공정은 한미 간에도 화두다. 방위비(미군의 한반도 주둔 비용) 분담 협상 때마다 매번 “제발 공정하게 해달라”는 쪽은 우리였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대로라면 애초 주한미군 유지 비용을 우리가 나눠 부담할 까닭이 없다. 시설과 부지 제공으로 우리 의무는 끝이다. 그런데도 잘살게 되지 않았냐며 경비에 좀 보태라고 우리한테 미국이 요구하기 시작한 게 1990년대 들면서다. 당시 4만4,000명가량이던 주한미군이 2만8,500명으로 줄었지만 분담금은 연간 1,073억원(1991년)에서 1조389억원(2019년)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안 줘도 될 돈을 깎는 게 늘 ‘을’의 일이었다.

지난달 본격화한 이번 협상에서는 입장이 바뀌었다. 거꾸로 갑(미국)이 을(한국)에게 ‘공평’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동맹과의 방위 조약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미국이 막대한 돈을 쓰고 있는데, 그 부담을 미 납세자들과 미군 주둔의 득을 보는 동맹이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는 게 미 정부 설명이다. 말 자체는 옳다. 동맹 양쪽 책임이 대칭을 이루는 게 자연스럽고 ‘세계의 전범’ 역할을 하느냐 마느냐는 미국의 선택이다.

그러나 저 주장은 견강부회 혐의가 짙다. 무엇보다 공평이 허구일 공산이 크다. 이번 방위비 협상 때 미국이 동맹 유지 비용 총액으로 제시했다고 알려진 50억달러(약 6조원) 전부의 용도가 과연 호혜적일까. 자국 이익만을 위한 일방적 비용까지 우리가 대줄 필요는 없다. 예컨대 지난해 협상 때부터 미국이 분담금 용처에 비용을 포함시키려 시도 중인 전략 자산(무기) 한반도 전개의 목적이 순전히 ‘북한으로부터의 한국 방위’일 거라 보기 어렵다. 미국의 동북아 견제 대상은 북한만이 아니다.

더 걱정스러운 건 살뜰히 공평을 챙기는 미국 태도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뒤 노골화한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세계를 이전투구 상태로 퇴행시키고 있어서다. 모범이 되기를 포기한 듯한 미국의 이런 자세는 공정한 과정이 정의로운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공정성 확보에 매달리느라 정작 교육이 교육적이냐 아니냐는 문제를 뒷전으로 미뤄버린 ‘정시 확대’ 결정의 무신경과 비슷하다.

양상은 다르지만 미국이 갑 노릇을 하는 건 북한에게도 마찬가지다. 반대급부 제공을 미루면서 비핵화부터 속도를 내라고 미국이 요구할 때 “불공평하다”는 북한의 불평을 무마하는 명분은 “결과를 정의롭게”다. 북한이 상대방이 되면 불공정 거래를 합리화하는 미국의 토대는 도덕적 우위다. 언제나 북한은 악당이 된다. 전후(戰後) 입법자가 미국인 만큼 불법 낙인은 질서에 도전하는 불온 집단에게 찍히게 마련이다. “우리도 북한보다 적지 않게 미사일 시험을 하고 있다”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1일 국회 발언은 그래서 너무 솔직했다.

방식은 달라도 남북한 둘 다 중국과의 패권 각축에 활용되는 미국의 도구다. 한국은 중국 포위를 위한 장기판 ‘졸’이고, 북한은 대중(對中) 적대를 감추는 데 요긴한 허수아비다. 그래도 미국한테 개 취급 당한 중동 변방 쿠르드족(토사구팽)이나 이슬람국가(IS)보다는 형편이 낫지 싶다. 그나마 돈이 많거나 핵을 가져서다. 을도 을 나름인 셈이다. ‘갑질’이라도 공정하기를 기대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권경성 정치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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