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 개인 넘어선 공적인 열망이 있을때, 비로소 공동체가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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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 개인 넘어선 공적인 열망이 있을때, 비로소 공동체가 성립한다

입력
2019.11.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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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열망이 정체성이다 

 ※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옷차림은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은유다. 옷차림엔 그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열망이 담겨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옷차림이 그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픈지 말하는 것 

 그럴싸한 대상과 닮고 싶어 하는 ‘동일시’ 통해 정체성이 형성돼 

 정치적 공동체도, 비록 당장 실현되지 않더라도 공적 열망 필요 

 사회ㆍ국가ㆍ지역공동체 이름으로 함께 탄 배에서 조타수 역할을 해 

사랑은 청년의 정체성인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좋아하던 이가 자신에게 애정 고백을 하면 날아갈 듯 기쁘지 않은가.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자, 상대가 나직하게 말한다. “조금만 더 가까이.” 그럴 때면 마치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사내는 그 바람이, 오래 전 누군가가 막 좋아지려 할 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온몸으로 맞았던 그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김애란 단편소설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조금만 더 가까이라니, 아, 꿈에 그리던 이와 포옹을 하는구나. 화려하게 펼쳐질 사랑을 앞둔 청년은 황홀감에 몸을 떤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이상(理想)을 품는 것은 과연 청년의 정체성인지. 모던(Modern) 록 밴드 델리스파이스는 1집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겨냥하는 건 저 별들, 너무 높은 표적들/너의 주인은 제우스가 모델인 목성.”

배설욕은 중년의 정체성인가. 차마 소리 내어 외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만 찾아 헤매던 화장실이 시야에 나타나면 날아갈 듯 기쁘지 않은가. 서로의 필요를 확인하자, 소변기 앞 안내문이 나직하게 말한다. “조금만 더 가까이.” 그럴 때면 마치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사내는 그 바람이, 오래 전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을 때, 온몸으로 맞았던 그 지하철 통풍구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김영민 미발표소설 ‘내게 초월빤스를 가져와라’) 조금만 더 가까이라니, 아, 나를 소변기 앞에 오줌 흘리는 더러운 놈으로 보는구나. 은은하게 스며드는 경멸감에 중년은 부르르 몸을 턴다. 대소변을 잘 가리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은 과연 중년의 특권인지. 얼리 모던(Early Modern) 록 밴드 허기진 노새들은 1집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겨냥하는 건 변비와 요실금 없는 삶, 너무 높은 표적들/너의 주인은 제우스가 모델인 전립선.”(김영민 미발표앨범 ‘허기진 노새와 배부른 나귀’)

소변기 앞의 ‘조금만 더 가까이’ 표지뿐 아니다. 어느덧 세상에는 인간을 경멸하는 말들로 가득하다. 길 가다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노상 방뇨 금지’ 표지(인간을 방뇨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말 아닌가) 고개를 돌려보면 붙어있는 ‘쓰레기 무단투기 금지’ 표지(인간을 쓰레기로 보는 말 아닌가) 백화점에 앞에 도열한 피켓 위에 쓰인 구호. ‘점원도 사람이다. 욕하지 마라’(인간을 폭언 기계로 간주하는 말 아닌가) 사람들이 계속 지퍼를 화장실 입구에서 올리다 보면, 조만간 ‘지퍼는 화장실 안에서 올리세요’라는 표지가 생겨날지 모른다. 사람들이 계속 씻기 귀찮아하다 보면, 조만간 ‘씻자. 우리는 인간이다. 해낼 수 있다’라는 표지가 생겨날지 모른다.

인간은 현재의 나와 다른 모습을 꿈꾸며 동일시 한다. 자신과는 다른 매력적인 대상을 향한 열망이 곧 정체성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사태를 개탄한다고 해서, 인간이란 고결한 존재라고 강변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실로 누고, 흘리고, 투기하고, 욕하고, 지퍼를 연다. 누구의 창자에도 약간의 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의 정체성은 아니다. 인간은 뭔가 그럴싸한 대상과 닮고 싶어 하며, 인간의 정체성은 그러한 동일시(Identification)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이미 똑같은 대상을 닮고자 하지는 않는다. 이미 같은데 뭘 새삼 닮으려고 하겠는가. 뭔가 다른 점이 있기에 닮고자 하고, 동일시하고자 한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현 상태에 있지 않고, 자신과는 다른 어떤 매력적인 대상을 향한 열망에 있다. 그 열망이 곧 정체성이다.

정체성의 한복판에 이상을 향한 열망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그러한 열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빈곤에 시달리다 보면, 생존 욕구 이상의 열망을 간직하기 어렵다. 자칫 그저 생존에 연연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생존밖에 남지 않은 존재에게, 의복은 몸 가리개에 불과하고, 음식은 연료에 불과하며, 사랑은 교미에 불과하다.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이상을 향한 열망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투신 자살을 하는 부자, 부하직원에게 지나친 횡포를 부리는 부자, 진상을 부리는 부자를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재산이 부자에게 궁극적인 충족감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는 많은 불행을 막아주지만, 모든 불행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빈부(貧富)의 먹잇감이 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열망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영화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여자의 옷차림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드러낸다고 말한 바 있다. 정체성은 벌거벗은 몸이나, 혹은 걸려 있는 옷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필 그 옷을 입고자 하는 열망 속에 있다. 그때 옷이란 추위를 막아주는 몸 가리개 이상의 것이듯, 정체성이란 생존 너머에 있는 존재의 심각한 사치이자, 시(詩)이자, 환상이다. 작가 로맹 가리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되어가는 대로 몸을 맡기지 않고, 마지막 남은 환상의 조각들을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존 기계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환상 없이는, 누군가 재해로 사망했을 때, 그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보상금 받으면 되잖아”라고 지껄이게 된다.

정치공동체는 생존을 추구하는 개인을 넘어선 공적인 열망이 있을 때 성립 가능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이것은 정치공동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쾌락과 고통에 조건반사로 응하는 존재들이 모였다고 해서 곧 정치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지, 그 공동체가 어떤 곳이길래 기꺼이 동일시하고자 하는지 물어야 한다. 생존에 필요한 이익을 넘어서는 그 어떤 심각한 열망도 없이, 친족을 넘어서는 어떤 비전도 없이, 순진무구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한다고 해서 곧 정치공동체가 성립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을 넘어선 공적인 열망이 있을 때 비로소 공동체가 성립한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리코는 “내 갈망을 상대가 포용하면서 내 갈망이 완전히 정당한 것임을 확인해주는 정당성의 확인은 우리가 욕망을 충족하는 것보다 더 갈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갈망의 충족 없이 개개인은 모래알에 불과하므로, 그 사회의 집단적 열망이 광기 어린 집단의식으로 변질될 까봐 경계하는 한편, 인간은 그 열망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와 동일시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원한다. 물론 인간의 열망과 행동에 모두 그런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는 말한다. “삶의 양식에는 형성적 행동 유형과 맞지 않는 우연한 행동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중요한 것은 집합체를 특징짓는 형성적 열망이지, 개인의 행동들이 엉망으로 엉킨 것이 아니다.” 자신이 열망하는 세상이 생전에 오지 않을 수는 있어도, 사람들은 그러한 공적 열망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사회를 이루며 살기를 원한다. 고매한 열망은 당장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하루하루의 행동에 방향을 제공한다. 사회라는 이름으로 혹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혹은 지역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함께 탄 배에서 조타수 역할을 해낸다. 그 조타수에 힘입어 사람은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를 넘어 공적 질서를 누려보고자 하는 용기를 내게 된다.

그것이 내가 오랜만에 방문한 상하이(上海)에서 택시를 탔던 이유이기도 하다. 낯설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이 복잡한 도시가 과연 우리가 닮을만한 곳인지, 동일시할만한 곳인지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운전사와 상하이 곳곳을 함께 돌아보기로 합의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그날의 일기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란 고귀하지만,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꿈인지 상기시켜 준다. “상하이에서 멘탈을 잃고 나는 쓰네. 아직 해가 지기 전, 와이탄으로 가는 대로였지. 내가 탄 택시 운전사가 건널목 빨간 불을 보고 차에서 갑자기 내리더군. 아무 말도 없이. 익숙한 생활의 예식을 집전하는 것처럼. 두세 차로를 지나 중앙분리대에 오른 그는 소변을 보기 시작했지. 파란불로 바뀌고도 한참 지속되는 긴 용변이었고, 그 긴 시간은 그가 오랜 시간 인내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지.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뒤 차들이 경적 한번 울리지 않고 내가 탄 택시를 우회해서 가더군. 앞으로 가며 나를 힐끗 보더군. 차도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차 뒷좌석에 홀로 남겨져 있자니 왠지 좀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아마 가을이 깊어졌기 때문이겠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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