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건강보조식품으로 즙을 내 먹는 비트는 잘 다듬어 오래 삶기만 해도 늦가을에 먹기 좋은 요리가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전쟁을 비롯한 나라의 어려움이 입지를 좌지우지하는 채소가 있다. 단단해서 생으로 먹기는 어렵고 삶아야 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2차 세계대전 중에 골칫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연료를 포함해 모든 물자가 부족한 여건에서 가정마다 이 채소를 삶으려는 시도 자체가 본의 아니게 이기적인 처사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공동체의 비트를 한데 모아 삶음으로써 최대한 물자를 아껴 가며 이 채소를 먹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될 채소가 있을까. 나도 전해 들은 이야기라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맛이 있든 없든, 이 채소를 먹으려면 오래 삶기는 삶아야 한다. 비트 말이다. 

무의 한 종류인 비트는 잘게 썰어 깍두기를 담가 먹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비트 요리로 활용하려면 

비트가 과연 우리의 밥상에 오르기는 하는 걸까. 잘 찾지 않아서 그렇지 비트는 건재한다. 동네 마트 이상의 식품 구입처에서는 없는 듯 있는 듯, 랩에 싸여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비트를 발견할 수 있다. 1982년에 국내 출간된 요리책에도 비트 샐러드가 실려 있으니 적어도 40년 가까이 우리는 이 채소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터넷을 검색하면 실제로 먹는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비트도 무의 종류이니 깍두기를 담가 먹는 것 정도야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실제로 많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쓰임새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요는 건강보조식품 역할의 비트즙이 차지하는데 그나마도 ‘많이 먹기는 힘들어요’라는 의견이 다수이다. 비트에서는 진한 흙내가 나는데 이를 생으로 즙을 내 마시려니 힘들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양파즙이나 사과즙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워낙 건강보조식품으로서 채소 및 과일즙을 믿지 않기도 하지만(특히 신장 건강이 안 좋다면 농축된 즙은 멀리하는 게 좋다), 삶이 불행해질 정도의 냄새를 풍기는 비트즙이라면 순전히 맛의 차원에서 아무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비트를 그저 채소의 하나로 활용해 식탁의 지평을 넓힐 수는 없을까. 전쟁통에 이기적인 처사가 될 정도인 삶기가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는 전쟁을 겪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끓는 물에 담가 놓기만 하면 되니 비트즙을 참고 마시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조리의 원칙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냄비에 물과 비트를 담고 중불에 올려 물이 끓기 시작하면 그대로 45분 가량 삶는다. 칼을 찔러 넣었을 때 저항이 거의 없이 편하게 들어간다면 다 익은 것이다. 삶은 비트를 건져 찬물에 담그면 껍질은 감자처럼 그저 손으로 쓱쓱 벗길 수 있다. 

그런데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기란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일단 비트의 크기가 모두 같아야 하며, 그것도 감자와 비교했듯 손에 쥘 수 있는 정도의 크기라야 큰 손질이 필요 없이 바로 삶아 먹을 수 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비트는 사정이 다르다. 서양처럼 이파리까지 달린 채로 쌓아 놓고 팔지도 않으니 대개 뿌리, 즉 비트만 남겨 랩으로 싸서 눈에 보일락말락 한 위치에 두세 개 둔다. 더군다나 그것들끼리도 대체로 크기가 들쭉날쭉인지라 그대로 익히면 큰 것은 한 시간이상 삶아야 한다. 아무리 전쟁통이 아니라지만 바쁘고 힘든 세상에 비트를 한 시간 넘게 삶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체로 비트는 어른의 주먹 크기인 작은 것과 그보다 2배쯤 되는 큰 것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단단한 비트 천천히 썰어야 

따라서 모든 조리가 그렇듯 식재료를 최대한 고르게 썰어야 할 텐데, 이제 자질구레하면서도 귀찮은 고난의 길이 열린다. 비트즙의 개성이 너무 강하다 보니 도마나 손을 물들여 버린다. ‘조리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씻으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비트즙은 예상보다 강하다. 도마나 손가락의 지문 사이로 금방 지워지지 않는 진보라색의 얼룩을 남긴다. 한술 더 떠 일반 무보다도 훨씬 딱딱해 칼질도 좀 더 신중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손에는 니트릴 고무 등으로 만든 밀착 조리 장갑을 끼고 도마에는 종이 호일을 깐다. 그리고 가장 작은 비트의 크기에 맞춰 일정하게 썬다. 

한국에 유통되는 모든 비트를 전수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관찰에 따르면 대체로 비트는 크고 작은 두 개가 한 조를 이뤄 판매대에서 대기하고 있다. 어른의 주먹(지름 7㎝안팎) 크기인 작은 것과 그 1.5~2배쯤 되는, 즉 갓난아기의 머리통만한 큰 것이다. 결국 이 둘의 조합으로 양을 가늠해 사야 되는데 일단 작은 것 하나는 권하지 않는다. 삶아 놓으면 정말 한 줌밖에 되지 않아 아예 비트 자체를 사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왕 먹겠다고 마음을 먹고 노력을 들이는 데 비해 양이 너무 적어서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을 정도다. 따라서 큰 것을 기본 단위로 삼고 작은 것을 보조 단위로 삼아 구매한다. 1, 2인 가구라면 그저 ‘비트를 한번 먹어는 봐야 되겠다’ 정도의 마음일 때 큰 것 하나면 충분하고, ‘즙도 먹는다는데 삶은 것쯤이야 전혀 문제없다’는 용자라면 작은 것 한 개를 덧붙인다. 그럼 삶아 놓은 비트가 나의 냉장고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압박을 느낄 때까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팔리는 비트의 크기가 대체로 1대 2의 비율이라 했으니 큰 것을 반으로 가르는 수준에서 손질은 일단 끝이다. 45분을 말했지만 이상적인 경우이고 물이 계속 부글부글 끓는 상태에서 60분은 삶아야 먹을 만하다. 당장 먹어야 한다면 수돗물에 담그고 아니라면 상온에서 느긋하게 식히는 가운데 껍질을 상온에서 식힌 뒤 껍질을 벗기고 원하는 크기와 모양으로 썰면 비트를 먹을 수 있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할 때는 비트의 껍질을 벗기고 깍두기 크기로 자르거나, 나박나박 썰어 간을 한 뒤에 30분간 익히면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런데 이마저도 너무 번거로운 건 아닐까. 가장 기본적인 조리법인 데다가 또한 전시도 아니지만 그래도 채소 하나 먹는 데 공을 너무 들인다는 회의를 떨칠 수 없다면 대안이 있기는 있다. 거의 모든 세대가 들여놓고 있지만 거주공간에서 차지하는 부피에 비해 제 역할은 다 못하는 것 같은 전자레인지이다. 뜨거운 물에 한 시간씩 삶을 필요가 없다면 훨씬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주류로 부상 못하고 대안에 머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익히는 과정이 편한 대신 손질에 수고가 많이 들어간다. 일단 껍질을 다 벗겨줘야 하며 표면적을 늘려 빨리 익도록 원하는 크기로 미리 썰어야 한다. 익히지 않은 비트의 딱딱함을 감안한다면 역시 만만치 않은 과업이다. 비트즙이 도마와 손을 물들인다고 했는데, 날 것을 더 길게 다뤄야 하므로 그만큼 도마와 손이 물들 확률도 높아진다. 

그래도 가스불을 한 시간씩 피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일단 비트의 껍질을 벗긴다. 손의 보호를 위해 장갑을 끼고 채소 껍질을 벗기는 필러를 쓴다. 감자에 비하면 훨씬 저항이 크므로 필러의 칼날을 미끄러트리면 잘 벗겨지지 않으니 좀 더 힘을 주어 누른 상태에서 천천히 밀어낸다. 옆으로 눕혀 윗동과 아랫동을 썰어내고 도마에 세운다. 칼을 쓰지 않는 손을 벌려 세운 비트의 윗부분을 움켜 쥐고 사이로 식도를 넣어 가르기 시작한다. 

삶거나 익힌 비트는 냉장고에 사흘간 두고 먹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친척 뻘인 무 같은 채소는 대체로 칼날을 넣을 때 힘이 들고 중심부로 들어갈 수록 힘이 덜 들어가는데 비트는 정반대이다. 처음에도 칼날이 잘 안 들어간다고 느낄 수 있지만 중심부로 갈수록 저항이 커진다. 따라서 ‘단칼에 무 썰듯’ 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하는 느낌으로 조금씩 썰어 내려간다. 반을 갈랐다면 다음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김치를 담그지는 않지만 ‘어쨌든 무는 깍두기’라는 믿음의 소유자라면 1.5㎝ 길이로 깍둑 썰고, 섞박지를 선호한다면 0.3㎝ 수준으로 나박나박 썬다. 비트의 단단함을 감안하면 후자가 조금 더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썰었든 볼에 담아 물을 바닥에 자작하게 붓고 소금간을 해 전자레인지에서 25~30분 익힌다. 고른 조리를 위해 절반쯤 돌린 뒤 전체를 한 번 뒤적여 준다. 익힌 비트는 냉장고에 사흘간 두고 먹을 수 있다. 

 ◇치즈ㆍ과일과 잘 어울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노라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길디 긴 과정을 거쳐 비트를 삶았고 고생은 끝났다. 익힘으로써 비트의 단맛이 살아나는 한편 날 것일 때의 흙냄새도 약간 아슬아슬하지만 대체로 유쾌한 쪽으로 살짝 잦아든다. 특히 이제 찾아올 낙엽이 땅을 뒤덮는 계절, 즉 늦가을에 정말 잘 어울리는 냄새라 짠맛과 신맛, 고소함을 지닌 식재료와 적절히 짝지어 주는 것만으로 그럴싸한 가을 음식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일단 짠맛과 고소함이라면 치즈를 생각해볼 수 있다. 비트는 치즈를 가리지 않아서 대체로 웬만한 종류와 무난히 짝을 이루는데, 그런 가운데 유난히 잘 어울리는 것들이 있다. 

비트는 염소젖 치즈나 블루치즈, 에멘탈 치즈 등 다양한 치즈와 두루 어울린다. 게티이미지뱅크

첫 번째는 염소젖 치즈이다. 일단 특유의 풀냄새가 비트의 흙냄새가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신맛을 적당히 품고 있어 물릴 수 있는 비트의 균형을 잡아준다. 한편 질감의 차원에서도 물컹거릴 수 있는 비트를 부드러움으로 잘 받쳐 준다. 비슷한 계열로 양젖으로 만드는 페타(그리스)나 푸른 곰팡이로 발효시켜 특유의 무늬가 두드러지는 스틸턴(영국), 로크포르(프랑스) 등의 블루치즈도 좋다. 두 번째는 페코리노(이탈리아)나 에멘탈(스위스), 콩테(프랑스)처럼 약간 단단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두드러지는 치즈이다. 한편 결이 다른 고소함을 비트와 엮고 싶다면 견과류도 좋은 선택이다.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가운데 껍질의 쓴맛이 비트의 흙냄새와 맛의 주도권 싸움을 벌일 호두가 최선이다. 

비트를 중심에 두고 치즈와 견과류, 과일만 적절히 더해 비네그레트에 버무리면 늦가을과 잘 어울리는 샐러드를 즐길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마지막으로 신맛과 단맛을 엮어준다는 차원에서 비트와 몇몇 과일이 좋은 짝을 이룬다. 일단 오렌지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 철이 아닌데, 대신 비트의 가을 느낌을 한껏 더 북돋아 줄 수 있는 사과가 있다. 다만 한국의 사과는 전반적으로 단맛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최대한 신맛을 지닌 품종과 짝을 지어줄 것을 권한다. 비트를 중심에 두고 이 세 가지의 식재료, 즉 치즈와 견과류, 과일만 적절히 더해 비네그레트에 버무리면 따뜻한 음식에 더 마음이 갈 이 계절에 차가우면서도 잘 어울리는 샐러드를 먹을 수 있다. 

비트는 레드벨벳케이크의 색을 낼 때도 요긴하게 사용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레드벨벳케이크 붉은색 낼 때도 활용 

2차 세계대전 중에 삶기가 번거로워 일종의 업둥이로 전락한 비트는 한편 디저트인 레드 벨벳 케이크를 구원해 평판의 균형을 맞추었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부터 존재했던 레드 벨벳 케이크는 원래 버터밀크나 식초의 산이 코코아 가루의 안토시아닌을 활성화시켜 특유의 붉은 색을 내는데, 궁핍하던 전쟁통에 비트즙이 대신 쓰인 것이다. 요즘의 코코아 가루는 즉 알칼리 처리 과정(더치 프로세스)을 거쳐 산과 반응하지 않으므로 레드 벨벳 케이크에 색을 제대로 내려면 ‘더치 프로세스’ 제품은 피한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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