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섭기자의 교과서 밖 과학]

과거 낮은 계층에 있었던 붉은털 원숭이는 집단 내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도 면역체계가 여전히 취약하게 유지됐다. 미국 듀크대 제공

사회적 지위가 낮은 계층은 질병이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원인으로 흔히 열악한 거주환경이나 적은 소득 등을 꼽지만 최근엔 ‘생물학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인간을 두고 한 실험은 아니지만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깝고 사회 생활하는 습성까지 유사한 영장류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참고할 만하다.

지난달 14일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미국 듀크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과거 집단에서 낮은 지위를 가졌다면 이후 사회적 위치가 높아져도 면역체계가 취약하게 유지되는 걸로 나타났다. 붉은털 원숭이 암컷 45마리를 대상으로 사회적 지위 변화가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 결과다.

연구진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원숭이들을 9마리씩 5개 집단으로 나눈 뒤 각 우리마다 한 마리씩 들여보냈다. 이들은 먼저 들어온 원숭이가 지배적인 지위를 갖는 식으로 집단 내 서열을 정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원숭이는 음식과 공간을 먼저 차지하고, 자주 털 손질을 했다. 누구의 지위가 더 높은지 과시하기 위해 다른 원숭이들을 밀어내는 행동도 보였다. 반면 집단에 늦게 들어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원숭이들은 괴롭힘을 당했고, 몸을 웅크린 채 주변만 맴돌았다.

1년이 지난 후 연구진은 5개 집단을 새로 만들어 원숭이 45마리를 이전과 다른 우리에 들여보냈다. 그러자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기면서 원숭이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변했다. 하위 계층에 있던 원숭이가 지배적 지위로 올라서는가 하면, 일부 원숭이는 복종적 위치에 있게 됐다. 그런 다음 연구진은 서열이 바뀐 원숭이의 혈액을 분석했다. 연구진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원숭이들의 면역체계는 집단 내 위치가 높아진 이후에도 취약한 상태로 유지됐다”며 “원숭이의 현재 지위뿐 아니라 과거의 사회적 지위 역시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원숭이들의 집단 내 지위가 나중에 어떻게 변한 것과 상관없이 3,735개 유전자가 과거의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미국 듀크대와 에모리대, 웨인주립대, 시카고대 등이 참여한 공동연구진이 지난해 12월 PNAS에 게재한 연구결과도 이와 비슷하다. 이들은 붉은털 원숭이 50여 마리를 9개 집단으로 나눈 뒤 각 원숭이의 혈액을 분석, 해당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원숭이의 말초면역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원숭이들의 혈액 내 세포가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알려진 ‘글루코코르티코이드’에 얼마나 반응하는지 살펴본 것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되는 글루코코르티코이드는 체내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고 염증이 생기는 걸 막는다. 면역반응에도 관여해 천식이나 자가면역질환 치료에 널리 쓰인다.

그 결과 사회적 지위가 낮은 원숭이의 혈액 세포는 지위가 높은 원숭이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글루코코르티코이드에 덜 반응했다. 연구진은 “집단 내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반응성이 달라진 건 ‘염색질 접근성’에서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며 “사회적 지위가 낮은 원숭이의 세포는 글루코코르티코이드가 보낸 신호에 잘 반응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염색질은 유전정보를 담은 DNA가 단백질(히스톤)을 감싸고 있는 형태다. 유전자가 잘 발현되려면 단백질에 엉켜 있는 DNA에 효소가 잘 들러붙을 수 있도록 염색질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연구진은 “원숭이와 인류의 유사성을 감안할 때 이번 연구결과는 사회적 지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한국건강형평성학회가 내놓은 ‘전국 17개 광역시ㆍ도 및 252개 시ㆍ군ㆍ구별 건강격차 프로파일’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소득하위 20%(78.9세)의 기대수명은 소득상위 20%(85.5세)보다 6.6년 짧았다. 2010∼2015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와 154만명의 사망 자료를 바탕으로 소득 상ㆍ하위 20% 집단을 비교ㆍ분석한 결과다. 기대수명은 출생아가 앞으로 몇 살까지 살 것인지 기대되는 평균 생존연수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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