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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맛빠기! 인도네시아] “칼 들고 쫓아오던 식인종 후예들, 이젠 민원 해결 졸라요”

입력
2019.10.31 04:40
수정
2019.10.31 09: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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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발전소 오지 마을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 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 사내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단도 파랑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 사내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단도 파랑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이름마저 ‘끝에 끝(ujung deleng)’ 마을이다. 이 밀림 너머 밀림에는 사람이 안 산다는 얘기다. 1995년에야 전기가 들어왔지만 뭐 좀 하려면 홀랑 끊겨 있으나 마나 했다던 두메, 읍내 장에 옥수수 내다 팔려면 꼬박 하루를 걸었다던 산골, 이방인이 나타나면 칼부터 들고 쫓아왔다던 벽지다. 정확한 통계 따위 눙치고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이 베바스(43) 이장 입에 붙은 동네 자랑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의 '끝에 끝' 마을을 오가는 부정기 버스. 도로가 포장되기 전엔 없었다. 찻삯은 향신료인 크미리를 1㎏을 팔아야 벌 수 있는 3만루피아(2,500원)로 오지 주민들에겐 거액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의 '끝에 끝' 마을을 오가는 부정기 버스. 도로가 포장되기 전엔 없었다. 찻삯은 향신료인 크미리를 1㎏을 팔아야 벌 수 있는 3만루피아(2,500원)로 오지 주민들에겐 거액이다.

문명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행정이 미치지 못하고 속도가 더딜 뿐이다. 입성은 초라해도 휴대폰을 끼고 살고, 상하좌우로 몸이 요동치는 차 한 대 지나기도 버거운 자갈 산길을 더 포장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다가 마을 공동화장실이 떡 하니 생긴 뒤론 개울에 쪼그려 앉는 일도 줄었다고 장담(그러나 여전히 개울에서 큰 볼일 보는 장면을 시시때때로 목격할 수 있었다)한다.

왐푸수력발전소. 그래픽=강준구 기자
왐푸수력발전소. 그래픽=강준구 기자

마을은 인도네시아 세 번째 도시인 수마트라섬의 북부수마트라주(州) 주도 메단에서 남서쪽 약 180㎞ 지점 밀림(행정구역상 카로군)에 있다. 불과 7~8년 전만 해도 2박3일이 걸린 머나먼 길이다.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 8㎞가량이 포장된 덕에 이제 차창을 죄어드는 수풀을 헤치는 시간 포함, 차로 6~7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면 닿는다. 그것만 해도 주민들에겐 천지개벽이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 가옥 풍경.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 가옥 풍경.

이 일대엔 무시무시한 식인 풍습의 역사가 전해진다. 사형수를 공개 처형한 뒤 시신의 특정 부위를 주민들이 나눠 먹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살이 붙어 인육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전설도 있다. 약 200년 전(1816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은 사라졌다. 인구의 87%인 무슬림이 요직을 장악한 나라에서 기독교 신자가 원주민의 75%를 차지하는 까닭에, 지리적 위치까지 더해져 국가 지원이 여전히 덜하다고 주민들은 믿는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밀림에 있는 뒷마을의 집 내부.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밀림에 있는 뒷마을의 집 내부.

바탁(batak)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인도네시아 인구의 3%를 차지하며 고유어와 인도네시아어를 공용한다. 성질이 급하고 두뇌가 명석해 한국인의 기질을 닮았다는 세평과 ‘잘되면 변호사, 잘못되면 사기꾼이 된다’는 속설이 떠돈다. 자카르타의 한 현지 변호사는 “실제 법조계에 바탁족이 많이 진출해 있다”고 말했다. 북부수마트라가 근거지로, 사는 지역에 따라 바탁카로족, 바탁토바족 등으로 세분된다.

동남아시아 최대 칼데라호인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토바 호수에서 낚싯대에 미끼를 달고 있는 주민.
동남아시아 최대 칼데라호인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토바 호수에서 낚싯대에 미끼를 달고 있는 주민.
동남아시아 최대 칼데라호인 토바 호수 풍경.
동남아시아 최대 칼데라호인 토바 호수 풍경.

식인은 동남아 최대 칼데라호인 토바호수 안의 섬 사모시르에 살았던 바탁토바족의 풍습이었다. 사모시르섬(630㎢)은 서울(605.5㎢)보다 넓다. 7만5,000년 전 화산 폭발로 생성된 토바호는 넓이 1,130㎢에 수심이 500m를 넘는데다 물결마저 파도처럼 밀려와 넋 놓고 바라보면 바다라는 착각에 빠진다. 400년 만(2010년)에 다시 살아나 2014년, 2016년 강력한 폭발로 인명을 앗아간 인근 시나붕 화산은 몇 달 전에도 2,000m 상공까지 화산재를 뿌렸다. 최근엔 호수 부근에 공항이 생겼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 주민들이 내다 파는 향신료 크미리 열매가 달리는 쿠쿠이나무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 주민들이 내다 파는 향신료 크미리 열매가 달리는 쿠쿠이나무들.

국제 관광지로 거듭나는 토바호에서 80㎞가량 떨어진 바탁카로족 주거 지역은 그야말로 깡촌이다. 밀림에 화전을 일구며 주로 옥수수와 산(山)벼인 파디(padi)를 재배한다. 바나나, 두리안, 카카오나무(초콜릿), 생선용 향신료인 크미리(kemiri) 열매가 달리는 쿠쿠이나무도 밀림에 널려있다. 수마트라 호랑이, 오랑우탄, 늘보원숭이(kukangㆍ쿠캉) 같은 멸종 위기 동물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파랑(인도네시아어) 또는 스킨(바탁어)이라 부르는 묵직한 단도를 필수품으로 허리나 등에 차고 다닌다. 장총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사내들도 있다. 칼집에서 날 선 칼을 뽑아 든 안타사리(30)씨는 “살상용이 아닌 맹수 퇴치와 수풀 제거용”이라고 웃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사내가 장총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사내가 장총을 보여주고 있다.

많고 많은 인도네시아 오지 중에 카로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안정적인 전기 공급, 도로 포장, 위생(공동화장실 건립) 및 교육 환경 개선, 일자리 제공 등 지역 발전을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수력발전소가 챙기고 있어서다. 발전소가 풍기는 부정적인 어감은 적어도 이 지역 주민들에겐 딴 나라 얘기다. 한국인만 만나면 뭐 좀 해달라는 게 인사일 정도로 민원 해결사, 대안 관청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잡은 트레클린 브라마나(55) 카로 군수조차 “지역의 유일한 투자 회사인 한국의 수력발전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고 인정했다.

구재관(왼쪽) 왐푸수력발전소 발전소장이 댐 위에서 현지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 있다.
구재관(왼쪽) 왐푸수력발전소 발전소장이 댐 위에서 현지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 있다.

시작은 공포였다. 한국중부발전(KOMIPO)이 현지에 세운 ㈜왐푸수력발전(PT. WEP)의 권두우(43) 차장은 “그간 외부와의 접촉이 없던 주민들이 초창기엔 맘에 안 들면 칼부터 들고 쫓아오는 통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한국 직원이 달아나기도 하고, 무장 경찰들이 상주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새댁이 아이를 안고 머리에는 농기구 등을 이고 밭으로 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새댁이 아이를 안고 머리에는 농기구 등을 이고 밭으로 향하고 있다.

생활의 불편을 덜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 한국이라는 바깥세상은 시나브로 주민들의 마음에 친구로 자리잡았다. 5년의 공사, 아니 체감상으로는 더 길었을 고진분투 끝에 수력발전소는 2016년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반경 100㎞에 상주하는 외국인 세 명을 전부 만난 걸 축하한다”는 최경환(59) WEP 대표의 말마따나 현재 최 대표, 구재관(45) 발전소장, 권 차장이 현지 직원들과 함께 발전소를 지키고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의 학교 교실 풍경. 천장은 곳곳이 뚫려 있고, 바닥은 패여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의 학교 교실 풍경. 천장은 곳곳이 뚫려 있고, 바닥은 패여 있다.

호기로운 이름과 달리 ‘끝에 끝’ 마을 너머 더 깊은 밀림 속에는 마을 두어 개가 더 있다. 어엿한 이름이 있지만 그저 옆 마을, 뒷마을로 불린다. 뒷마을 초입엔 바닥이 패이고 천장 곳곳이 뚫리고 교실 칸막이가 뒤틀린 단층 초등학교 건물이 있다. ‘칠판은 제 기능을 할까’ 독백이 샐 정도다. 그런데 책과 교복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만큼이나 깨끗하다. 마을 대표격인 이진(47)씨는 “수력발전소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고마워했다. 우리네 옛날 시골 풍경처럼 머리에 농기구 등 짐을 인 스무 살 새댁이 아이를 가슴에 안고 파디 씨를 뿌리러 가고 있었다. 밭에선 아낙네들이 줄지어 가며 대나무를 땅에 콩콩 찍고 그 안에 파디 씨를 심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아낙들이 대나무로 땅을 찍은 자리에 산벼인 파디 씨를 심고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아낙들이 대나무로 땅을 찍은 자리에 산벼인 파디 씨를 심고 있다.

외부인의 발걸음이 드문 오지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공존 의미 그리고 우리나라 기업들의 존재 가치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나저나 “다시 오라”는 최 대표의 작별인사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오가는 길이 너무 고되다. 그래도 그립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아낙들이 파디 씨를 심은 뒤 두리안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 카로 지역 밀림의 오지에 살고 있는 아낙들이 파디 씨를 심은 뒤 두리안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의 학교 교실 풍경.
인도네시아 북부수마트라주의 오지 '끝에 끝' 마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뒷마을의 학교 교실 풍경.

수마트라 카로ㆍ토바=글ㆍ사진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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