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는 없고 깃발만 남은 소득주도성장
먹고 사는 문제만큼은 근본주의 벗어나야
대통령이 경제 엄중함 있는 그대로 알리길
”그동안 진보 진영은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성장에 대한 담론이 부족했다. 경제 성장이나 국가 경쟁력에 관심을 덜 가졌던 게 사실이다. 이제 성장에서도 보수와 경쟁해 지지 않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패한 뒤 낸 실패 보고서 성격의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대선 패인을 진보 진영의 근본주의로 규정했다. 특히 성장 담론에서 보수 진영보다 우위를 확보하는 새로운 성장 전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이다. 일자리를 늘리고 고용의 질을 개선해서 중산층과 서민들의 소비 능력을 높이는 것을 성장 동력으로 삼자는 전략이다.
문재인 정부 집권 후 실행에 옮겨진 ‘소주성’은 지금 깃발만 외롭게 펄럭인다. 깃발을 지탱하는 받침돌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라지고 부서졌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자회사 고용 방식의, 무늬만 정규직화에 그쳤고 최저임금 인상은 부도 수표(1만원 인상 공약) 남발에 자영업자들의 주름살만 늘렸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제대로 시행도 못한 채 퇴로 찾기에 바쁘다. 그 사이 나라 경제는 침몰 직전의 난파선처럼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직접적인 요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수출 위주 경제 체제인 우리에게 미중 무역분쟁은 치명적이다. 산업구조 재편과 체질 개선을 방관한 이전 정부의 책임도 없지 않다.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현 정부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경제는 2017년 9월 정점을 찍은 후 24개월째 후퇴하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해 새로운 경제 정책을 본격화한 시점이다. 물론 당시 정부가 경기 하강의 시작을 알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허약해진 몸에 강한 항생제를 한꺼번에 투약한 모양새가 됐다.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전략이라면 사전에 부작용이나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는데 이를 간과한 점도 패착이다. 정권 초기의 높은 지지율에 취해 지나친 자신감과 낙관론에 빠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경제 위기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우리 경제의 건실함은 세계에서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 책임자들도 경제 지표의 좋은 쪽만 보려고 한다. 듣는 얘기로는 청와대도 경제가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대통령이 나서서 어렵다고 하면 민간 부문이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가 심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지금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다. 경제 주체 모두가 어려운 경제 현실을 체감하고 있는데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경제의 엄중함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정부가 경기 회복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시그널을 명확하고 일관되게 전달해야 한다.
정부가 발신하는 신호가 명확하지 않으니 경제 주체들의 혼란만 커지고 있다. 노동계는 노동계대로 “정권이 변했다”며 반발하고 있고, 재계는 “정부의 유화적 태도를 못 믿겠다”며 엉거주춤하고 있다. 민간의 투자와 소비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려면 ‘경제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 지지층을 비롯한 많은 국민이 경제에서 실력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와 복지라는 낡은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국가의 미래에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에서만큼은 과거 문 대통령이 말한 대로 근본주의에서 탈피할 때가 됐다.
미국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꼴찌 평가를 받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큰소리를 치는 것도, 일본의 아베 총리가 역대 최장수 총리에 오른 것도 ‘강한 경제’ 때문이다. 내년 총선에서 가장 큰 쟁점은 경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 첫걸음은 솔직함이어야 한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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