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의 저물가 상황을 두고 “일시적 공급 측 요인뿐 아니라 수요 측 요인도 주요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의 저물가가 복지정책이나 유가, 채소류 등 정책적 영향이나 특정 품목 등 공급 측 요인 때문이라는 정부 입장과 상반된 것이어서 주목된다. KDI는 또 “우리나라의 통화정책 운용체계가 물가안정ㆍ금융안정을 동시에 신경쓰기 어려운 구조적 제약이 있다”며 한국은행법에 명시된 ‘금융안정’ 목표를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KDI는 28일 ‘최근 물가상승률 하락에 대한 평가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올해 물가상승률 하락은 복지정책, 특정 품목에 의해 주도됐다기보다는 다수의 품목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며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이 모두 하락한 것은 공급 충격보다는 수요 충격이 더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올해 1~9월의 물가상승률(0.4%)은 2013~2018년 평균인 1.3%보다 0.9%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이를 세분화하면 날씨나 유가 등에 영향을 받는 식료품 에너지의 물가상승률 기여도가 -0.2%포인트였고, 식료품ㆍ에너지를 제외한 상품(-0.3%포인트), 서비스(-0.4%포인트)의 물가상승률 기여도가 오히려 더 크게 작용했다는 KDI의 분석이다. 더구나 1~9월 물가상승률이 지난해에 비해 낮아진 품목이 63.7%로 집계되는 만큼 물가 하락이 일부 품목에만 집중돼 발생했다고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KDI는 덧붙였다.
KDI는 그러면서 최근의 물가상승률 하락은 수요 측 요인이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규철 KDI 연구위원은 “물가상승률을 공급 충격이 주도하는 경우에는 경제성장률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수요 충격이 주도하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정 연구위원은 그러면서 “세계금융위기 이후 낮아졌던 물가상승률 추세가 주요국에서는 반등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낮은 물가상승률을 전 세계적인 저물가 현상의 반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꼬집었다. 앞서 정부는 올해 들어 0%대 저물가가 지속되는 것과 관련 “세계적인 저물가의 영향도 없잖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와 상반된 분석을 내놓은 셈이다. 다만 KDI는 “공급 측의 주요 단기적 영향이 배제된 근원물가는 0%대 중반의 상승률을 유지, 일시적 요인이 사라지면 물가가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해, 디플레이션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내비쳤다.
저물가 현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통화정책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게 KDI의 판단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해 11월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이다. KDI는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나타내는 근원물가 상승률이 상당기간 1% 내외에 정체되고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도 하락했지만 통화당국은 금리를 인상했다”며 “당시 결정문을 보면 금리 인상을 결정한 것은 가계부채, 즉 금융안정 문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저물가 상황임에도 금융안정을 위해서만 기준금리를 인하했다는 얘기다.
이에 KDI는 한국은행법에서 ‘금융안정’ 목표를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1년 한은법 개정으로 기존 물가안정 목표에 금융안정 목표가 추가됐는데, 통화정책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통화정책은 본연의 책무인 물가안정에 중심을 둬야 한다”며 “금융안정을 위해서는 거시건전성 규제 등 금융정책을 우선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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