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참여형 극 뜻하는 ‘이머시브’ 공연
형식과 내용 다양해지며 관객 호평
‘까마귀의 눈’ 배우들이 관객과 무대 경계가 없는 공연장에서 연기하고 있다. 관객들은 마치 미술관을 거닐 듯 객석과 무대가 구분돼 있지 않은 공간을 이동하며 극을 관람할 수 있다. 국립극단 제공

“오늘은 마치 무대가 미술관인 것처럼 해 보려 합니다. 관객 여러분은 무대에 배우와 함께 있을 것이고 앉으셔도 걸어 다니셔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저기로 가서 이 각도로 극을 보겠다’ 하는 마음 드실 때 움직이면 됩니다.”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장 소극장 판. 시인 이상의 ‘오감도’를 무대로 옮겨 표현한 즉흥극 ‘까마귀의 눈’이 시작되기 전 김철승 연출가가 공연장 밖에서 관객을 맞았다. 배우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 자유롭게 움직여도 된다고 설명하는 김 연출가를 따라 관객들이 무대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거나 엎드려 있는 배우들, 그리고 이들을 마치 미술작품처럼 감상하는 배우들은 김 연출가의 말대로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배우들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연기를 잇고, 김 연출가는 관객들의 분위기 변화를 세심하게 읽어 배우들의 귀에 대고 연기를 지시했다. 관객은 배우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이들의 행동과 대사를 지켜봤다. 관객들은 마치 극의 한 요소가 된 듯 강하게 극에 몰입했다.

관객 참여형 공연을 뜻하는 ‘이머시브 극(immersive theater)’ 형태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관객이 직접 결말을 고르는 넷플릭스의 드라마 ‘밴더스내치’처럼 콘텐츠 시장에 인터랙티브 바람이 부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 관객이 결말을 선택하거나 토론에 참여하는 극이 무대에 오르는 데서 나아가 극 제작 초기부터 관객들의 논의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거나 무대의 경계 자체를 없애는 극이 잇따라 공연되는 중이다.

최근 몇 년간 이머시브 극은 공연계 대세로 자리잡았다. ‘밴더스내치’처럼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해 관객들에게 몇 가지 결말을 제시하고 선택하도록 하는 극(지난 7, 8월 ‘시비노자’ ‘#나만빼고’)이 등장하는가 하면, 배우들이 여러 차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함께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극(지난 8월 ‘쉬어매드니스’)도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의 대표적 이머시브 극인 ‘위대한 개츠비’ 공연 모습. 관객들은 무대 곳곳에서 연기하는 배우나 장면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골라 볼 수 있다.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머시브 극이 관객 호평을 받으면서 그 형태는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까마귀의 눈’처럼 하반기에는 무대 위 배우와 관객의 구분을 아예 없애는 작품들이 속속 공연 중이거나 공연 예정이다. 남산예술센터에서 6일 개막하는 연극 ‘휴먼 푸가’가 대표적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극으로, 무대 위 배우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객석이 마련되는 형태다. 무대가 하나의 관(棺)처럼 묘사돼 그 안에 배우와 관객이 함께 들어가 있는 구성으로, 배우가 묘사하는 상황과 감정을 관객이 그대로 흡수할 수 있다. 배우들이 밀가루를 주요 오브제로 사용해 관객에게 와 닿기도 한다.

12월 국내 공연되는 영국의 스테디셀러 극인 ‘위대한 개츠비’ 역시 무대와 관객석 구분을 없애 현장성과 즉흥성을 활용한다. 관객들은 마치 극 속 개츠비에게 초대받은 파티 손님 중 한 명이 돼 여러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지는 무대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관객이 자신이 보고 싶은 스토리라인을 직접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이머시브 형태다.

다음달 6일 개막하는 ‘휴먼 푸가’ 속 배우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다. 배우가 서는 무대 위에 객석이 마련된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극의 이야기와 형태를 완전히 연극 밖 대규모 집단의 아이디어에서 가져 온 작품도 있다.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극단 도이체스 테아터가 지난달 한국에서 선보인 ‘렛 뎀 잇 머니(let them eat money)’는 극단이 1년여간 사회학자, 과학자 등 전문가 및 시민 250명 등과 ‘2028년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논의한 결과를 무대화한 작품이다. 토론자들이 떠올린 유로존 붕괴부터 난민 대이동, 인공지능(AI)에 의해 대체되는 노동 등 다양한 주제가 연출가의 손을 거쳐 극으로 옮겨졌다. 안드레스 바이엘 연출가는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무대와 무대 밖, 극에 참여하는 이와 아닌 이를 분리한 채 두는 것이 아니라 연결시켜 메시지를 확장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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