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한국 위상, 여타국 움직임, 당장의 피해 여부 감안”
“방위비 분담금ㆍ차 관세 부과 등 대미 관계도 고려” 분석
정부가 25일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선언한 데에는 복합적 변수가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밝힌 표면적 이유는 △우리나라의 대외 위상이 이미 선진국급인 점 △개도국 지위 포기국이 속출하는 점 △차기 WTO 협상까지 개도국 특혜가 유지되는 점이다. 여기에 최고조에 이른 미국의 통상 압박을 완화할 ‘카드’가 필요하다는 현실적 계산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정부 안팎의 중론이다.(본보 21일자 1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WTO 가입(1995년)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 경제는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2위, 수출 6위, 국민소득 3만달러 등 선진국 반열에 오를 정도로 발전했다”며 “경제적 위상을 감안했을 때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개도국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싱가포르, 브라질, 대만 등 우리나라와 경제 규모나 위상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국가들이 앞으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터라 우리만 특혜를 주장할 명분이 없다는 당국 판단도 이번 결정의 주요 이유로 꼽힌다. 향후 재개될 WTO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지켜낼 가능성이 없는 마당에 결단을 늦출수록 명분과 협상력을 모두 잃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개도국 지위 포기가 당분간 실질적 손해 없는 선언적 조치에 머문다는 점은 정부가 가장 강조하는 바다. 휴면 상태인 WTO 협상이 다시 열리기 전까지는 지금까지 누려온 특혜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까운 시일 내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농업 분야가 포함된 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은 회원국별 입장 차로 10여 년 넘게 중단된 상태여서 언제 협상이 시작될지, 협정 체결이 과연 가능할지 현재로서는 미지수라는 거다. 홍 부총리는 “향후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당장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으며, 미래 협상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영향에 대비할 시간과 여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결정 요인은 미국의 통상 압력이라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미국은 현재 우리나라를 상대로 내년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적 인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수입 자동차를 대상으로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수입 제한 및 관세 부과를 다음달 13일 시한으로 검토하고 있다. 또 조만간 환율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요국의 ‘환율 조작’ 여부를 평가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미 무역대표부(USTR)에 ‘잘 사는 나라들이 WTO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경우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도록 하라’고 엄포를 놓자 정부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미국이 WTO에 제시한 4가지 ‘개도국 제외’ 기준(OECD 회원국, 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 고소득 국가, 세계 무역량 0.5% 이상 점유국)에 모두 해당하는 유일한 나라여서 사실상 미국의 주요 타깃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런 관측에 대해 홍 부총리는 “미국의 관세부과 사안 때문에 이 사안(WTO 개도국 특혜 포기)을 고려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세종=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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