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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철수로부터 16일, 터키 침공 13일 만인 22일(현지시간) 시리아 북동부 지정학적 질서에는 큰 지각변동이 생겼다. ‘5일 휴전’이 끝난 이 날, 21세기 ‘차르’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쿠르드 민병대(YPG)를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철수시키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이 투입돼 ‘밀어내기’ 작업이 끝나면, 러시아·터키군이 ‘합동 순찰’까지 하기로 했다.
승패는 선명했다. 신고립주의를 자처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패자’소리를 면치 못한 사이, 푸틴은 시리아 북동부 요충지에 무혈입성하며 중동의 최대 중재자로 부상했다. 미국의 묵인과 러시아의 승인 하에 터키 역시 눈엣가시이던 쿠르드를 몰아내고, 자치지역을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터키와 러시아의 승전보 속 묻히고 있는 사실들이 있다.
지난 9일 터키가 ‘평화의 샘’이라는 역설적인 작전명 아래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 자치 지역을 침공한 이후 17만6,000명 이상의 난민(유엔)이 발생한 것은 물론, 터키의 지원 세력들이 민간인을 상대로 ‘악마의 무기’ 백린탄을 사용했다는 의혹 제기도 잇따르고 있다. 나라 없는 쿠르드의 운명을 미국과 러시아가 자국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사이, 애꿎은 민간인들이 피와 눈물을 쏟아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터키-시리아 국경에서 큰 성공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지난 14일 부과했던 대(對) 터키 제재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터키가 영구적 휴전을 알려왔으며, 이제 쿠르드족의 안전도 보장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CNN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의 국제법 위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 뼈 보일 때까지 피부 녹이는 ‘악마의 무기’
같은 날, 짐 제프리 미 국무부 시리아 특별대표는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터키 침공 과정에서) 전쟁범죄로 간주되는 사건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즉결 처형과 무차별적인 민간인 공격 외에, 특히 논란의 핵심은 백린탄 사용 여부다. 터키는 “가짜 뉴스”라며 일축하고 있지만, 쿠르드계 언론뿐 아니라 서구 외신들이 백린탄 부상자로 추정되는 환자들의 사진을 연이어 보도하면서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미국과 터키는 지난 17일 ‘5일 휴전’에 합의했으나, 합의 직후에도 국경지에서 포격과 총격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쿠르드족 자치 정부는 성명을 내고 “(터키가) 백린탄과 네이팜탄 등 국제적으로 금지된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면서 국제적인 조사를 촉구했다. 이후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영국 더 선과 더 타임스 등 서구권 매체들이 시리아 북동부 병원에 이송된 환자들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백린탄 사용 의혹’은 더욱 불붙었다.
백린탄(白燐彈) 폭발력 자체는 크지 않으나, 발화시 섭씨 4,000~5,000도까지 달하는 뜨거운 화염을 뿜어낸다. 인체의 수분과 반응해 화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물로도 상처 부위를 진정시킬 수 없다. 인체에 닿으면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살을 녹이고, 백린탄이 터진 주변의 공기를 마시면 호흡기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국제법상 인명살상용이 아닌 연막탄ㆍ조명탄 용도로만 사용하도록 엄격하게 제한된 이유다.
외신에 보도된 사진들을 보면 환자들은 피부가 녹아내려 온몸이 심각한 화상 수포로 뒤덮이고, 피딱지가 앉아있는 끔찍한 몰골이다. 사진을 본 전문가들은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백린탄 등 화학무기에 의한 부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에 세계보건기구(WHO)와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등이 관련 조사에 착수한 상황이다.
◇ 미국 제재 아랑곳하지 않고 S-400 추가 도입 논의
백린탄 사용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터키의 침공 이후 국제사회의 비판은 쇄도했다. BBC에 따르면 독일, 영국 등 유럽 9개국이 연달아 터키에 대한 무기 수출 허가 승인을 중단하거나 제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슬람국가(IS) 격퇴전 동맹이던 YPG를 스스로 내친 트럼프 대통령조차 초당적인 비판 세례에 뒤늦게 강력한 경제 제재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정작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동맹들의 경고와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13일 에르도안은 “우리는 경제 제재와 무기 금수 조치라는 위협을 마주하고 있으나, 이걸로 터키를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해”라고 강조했다고 BBC는 전했다. 터키가 이처럼 버틸 수 있는 배경에는 물론 부쩍 우애가 돈독해진 러시아가 있다.
터키의 전통 우방은 그동안 단연 미국이었다. 터키의 2008~2017년 무기 수입 현황만 봐도 압도적인 1위 미국(약 35억 달러)에 2위인 한국(약 10억 달러)은 한참 못 미친다(2018 세계 방산시장 연감). 그런데 2016년 7월 터키의 군부 쿠데타 이후 터키와 미국, 나아가 나토 사이의 신뢰 축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당시 미국이 쿠데타 배후로 지목된 재미 이슬람 학자 펫훌라흐 귈렌에 대한 터키의 소환 요구를 거부했고, 이때부터 앙금이 쌓인 것이다.
갈등이 가시화된 것은 2017년 말 터키가 러시아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라 불리는 ‘S-400’ 지대공 미사일 도입을 결정하면서부터다. S-400 미사일은 최대 사거리가 400㎞, 최고 속도 시속 1만4,688㎞(음속의 12배)에 달하는 방공용으로 한꺼번에 100개의 공중표적을 추적해 동시에 표적 6개를 격추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앞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 행정부가 터키의 기술이전 요구를 거부해 미국산 패트리엇 지대공 미사일 구매가 불발되자, 에르도안 대통령이 러시아에 눈을 돌린 결과다. 이에 미국은 민감한 군사 정보가 러시아에 넘어갈 수 있다며, 이미 인도 계약이 완료됐던 F-35 스텔스 전투기 판매를 파기함으로써 보복을 가했다.
터키는 이제 대놓고 러시아에 밀착하는 모양새다. 23일 일간 ‘데일리 사바’ 등 터키 현지 매체들은 터키에 S-400 시스템 전체가 인도 완료됐으며, 추가 도입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1차 인도분이 터키에 들어왔던 7월만 해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2020년 4월은 돼야 S-400 인도가 마무리될 것”이라며 미국의 속내를 떠보는 발언을 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 "2023년까지 군사 수요 75% 자체 생산할 것"
터키의 자신감은 지난 수년간 박차를 가해온 ‘국방 자주화’ 성과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다. BBC에 따르면 1991~2017년 터키는 세계 5위 무기수입국일 정도로 국방 부문의 대외의존도가 높았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제11차 터키개발계획’에서 터키는 독립 100주년인 오는 2023년까지 자국 군사수요의 75%를 자체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운 상태다.
완전히 허무맹랑한 포부도 아니다. 터키가 이미 자체 개발에 성공한 무기들은 공격헬기(T129), 탄도미사일(보라1), 전차(T-155) 등 다양하다. 한국의 K9 자주포 기술을 기반으로 만든 T-155도 이번 ‘평화의 샘’ 작전에서 운용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지난해 9월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가 군사 작전에서 운용하는 무기의 65%가 자체 생산품이라고 자랑했을 정도다.
미국은 핵무기 개발 의지까지 공공연하게 떠들며, 친러 행보를 걷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두고 고심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 정치전문매체 더 힐은 23일 나토에서 터키를 축출하자고 주장하는 일부 미 전문가들을 놓고 “세계 군사력 9위(글로벌파이어파워)의 터키가 나토에 필수적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일축하면서 “미국은 귀중한 동맹국을 나토 체제에 묶어두고, 터키가 ‘위험한 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써야 한다”고 제언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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