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우려에 ‘야생 멧돼지 소탕 작전’ 실시
먹이 부족으로 도심에 출몰한 멧돼지도 죽음 면치 못해
요즘처럼 멧돼지에게 힘든 시기가 있었을까요? 전염병에 먹이 부족, 로드킬까지 멧돼지에겐 참 살기 퍽퍽한 세상이 됐습니다.
멧돼지는 인간과 가까운 동물은 아니었어요. 우리에게 익숙한 분홍색 일반 돼지와 달리, 털이 갈색 또는 검은색으로 어두운 데다 뻣뻣해서 다소 사나운 인상을 남기지요. 커다란 송곳니는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하고요. 몸무게가 최대 200㎏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만화영화 ‘라이언킹’에 나오는 멧돼지 ‘품바’처럼 마냥 귀엽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멧돼지의 주요 서식지는 깊은 산, 특히 활엽수가 우거진 곳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주로 사는 곳은 아닌데요. 그런 멧돼지가 고난을 겪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 옮길라 “소탕 작전”
중국과 북한 등 여러 국가를 휩쓴 공포의 바이러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지난달 국내에도 침투했습니다. 아직까지 백신이 없어 당분간은 예방만이 정답인 돼지열병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일반 돼지들도 살처분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은 멧돼지를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멧돼지 사체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돼 방역에 비상이 걸린 겁니다.
경기도 연천과 파주의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에서 발견된 멧돼지 2마리의 폐사체에서 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잇달아 검출된 사실이 지난 17일 알려졌습니다. 이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돼지열병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야생 멧돼지 포획 작전’에 돌입했어요. 파주시는 군인과 엽사 등으로 조를 편성해 총기로 야생 멧돼지를 포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살된 멧돼지는 군이 지정한 장소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고요.
하지만 이 ‘소탕 작전’이 오히려 돼지열병 바이러스 확산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은 “민간 엽사 등 대규모 인력을 투입하여 총기로 사살하는 등의 적극적인 포획 작전이야말로 아프리카돼지열병을 확산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조치”라고 지적했어요. 멧돼지와 접촉한 사람이 바이러스를 옮길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죠. 동물해방물결은 성명서를 통해 “멧돼지가 흘린 피뿐만 아니라 수렵인의 신발·옷·장비·자동차 등에 묻은 바이러스는 간접전파의 여지가 있다. 결국 대규모 인력 투입은 도리어 확산 가능성을 높이는 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도심에 출몰한 멧돼지들… 이유는 “배고파서”
서울과 경기도, 세종, 청주, 대구, 울산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도심에 멧돼지가 출몰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17일에는 주변에 산도 없는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 멧돼지가 나타났다는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는데요. 같은 날 충북 청주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발견된 멧돼지는 출동한 경찰관의 허벅지를 물어 부상을 입혔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도 멧돼지는 발견됐습니다. 지난 7일 세종시 신도심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멧돼지 2마리가 어슬렁거리다 포획됐는데요.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 멧돼지들은 모두 사살당했고, 인근 지하차도에서는 차에 치여 죽은 새끼 멧돼지 2마리도 발견됐습니다.
깊은 산속 활엽수림에 살아야 할 멧돼지가 서울 강남의 아파트 단지, 신도심 아파트 지하주차장에는 무슨 일로 나타난 걸까요? 분명한 건 사람이 좋아서, 도시를 구경하려고 오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서식지가 줄어들고 먹을 것이 부족하다 보니 배를 채울 무언가를 찾아서 도심까지 오게 된 거죠. 특히 멧돼지의 번식기인 10월에는 먹이를 더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활동도 왕성해지고 움직이는 반경도 넓어지게 됩니다. 소방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멧돼지 포획을 위한 119 출동은 총 2,854건, 월평균 238건인데요. 월별로 보면 9월에는 902건, 10월에는 1,508건, 11월에는 1,211건으로 500~700건대에 그치는 다른 달보다 부쩍 느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멧돼지를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침착하게 행동하세요. 멧돼지는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이거든요. 사람이 비명을 지르거나 과격하게 움직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거나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차분하게 멧돼지의 눈을 보면서 살금살금 주변 나무나 바위 등으로 몸을 우선 숨겨야 합니다. 자극하는 행동은 절대 안 됩니다. 만약 멧돼지가 사람을 위협하는 경우에는 먼저 대피를 한 뒤 119에 신고를 해야 합니다.
◇도로 따라 걷던 멧돼지 10마리 ‘참변’ 겪기도
멧돼지는 ‘로드킬(도로에서 야생 동물이 차에 치여 죽는 일)’의 대표적인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특히 멧돼지 일가족 10마리가 로드킬로 모두 죽었다는 소식에 누리꾼들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지난 17일 밤 11시 50분쯤 울산 울주군 온양읍 14호 국도에서 벌어진 일인데요. 도로를 따라 줄지어 이동하던 어미 멧돼지와 새끼 등 10마리가 차에 치여 죽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로드킬 사고는 특히 어두운 밤에 일어나기 쉬운데요. 지난 23일 경부고속도로 남양산 나들목 하행선 진입 200m 지점에서 일어난 멧돼지 로드킬 사고 발생 시각도 이날 0시 42분쯤이었습니다. 또 로드킬 사고는 가로등이 많은 고속도로보다는 일반국도에서 발생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깊은 밤 외진 일반 국도를 운전하고 갈 때는 갑자기 튀어나올 야생동물에 대비하는 방어운전 방식도 필요해 보입니다.
이정은 기자 4tmr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