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경남 창원체육관에서 열린 2019~20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창원 LG 세이커스와 원주 DB 프로미 경기에서 현주엽 LG 감독이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창원=연합뉴스

지난 5월 초 2018~19 시즌 한국프로농구(KBL) 현대모비스의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유재학 감독을 비롯해 양동근 이대성 선수 등 우승을 이끈 주인공들이 나와있었다. 마침 앞자리에 이대성 선수가 앉아 챔피언시리즈 MVP가 된 소감과 신혼여행 계획, 몸 관리 방법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지나자 옆자리에서 과거의 농구이야기가 시작됐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농구대잔치 시절의 화려했던 영광을 되새김질하며 지금 땅에 떨어진 프로농구의 인기를 아쉬워했다. 이때 이대성이 한마디 툭 던졌다. 자신은 학생 때나 지금이나 한 번도 농구의 인기를 실감한 적이 없었다고. 옛날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자기가 겪어온 농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고 했다.

챔프전 MVP의 한숨 섞인 푸념이 가슴에 박혔다. 모든 것을 다 누린 듯한 586 세대를 바라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청년들의 원망이 오버랩 됐다.

실제로 국민들의 농구에 대한 기억도 20~30년 전에 멈춰있는 듯하다. 허재 서장훈 현주엽 문경은 이상민 등의 이름은 기억해도 우승반지가 6개나 되고 정규리그 MVP 4회, 플레이오프 MVP 3회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양동근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몇 년 전 MVP를 받았던 A 선수는 축하 모임을 마치고 흥이 나 시내를 활보했는데 자신을 붙잡기는커녕 알아보는 이들도 없었다며 씁쓸해했다.

이달 초 KBL 2019~20 시즌이 시작됐다. 팬들의 관심은 현주엽 감독이 이끄는 LG 세이커스에 집중되고 있다. 홈이건 원정이건 관중들은 현주엽을 연호하며 LG 선수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KBS2 주말 예능 프로그램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출연 영향이 크다. 현 감독의 상상을 초월하는 먹방과 선수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에피소드가 제법 인기를 끌었다. 농구에 관심 없던 시청자들도 LG 선수 한 명 한 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송 출연은 ‘양날의 검’이다. 개막 직후 LG는 5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여지없이 비난이 쏟아졌다. 팬들은 ‘방송에 한눈 파느라 훈련을 게을리한 것 아니냐’ ‘농구 관두고 예능이나 하라‘며 몰아붙였다.

현 감독은 이런 비난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구단에 물어보니 이미 각오했던 일이라고 한다. 처음 방송국에서 구단에 출연을 요청해왔을 때, 현역 감독과 선수들이 노출되는 문제라 쉽게 결정 내리지 못했다. 성적이 받쳐주면 좋겠지만 아니면 감독에게 치명적인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처음엔 현 감독도 고사했다고 한다. 고심하던 현 감독이 선수들을 알릴 수 있는 기회라면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고 해 결국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관 방송사마저 중계권을 포기할 정도로 추락한 프로농구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선 물불 가릴 게 없었다.

현 감독만이 아니다. ‘떡 사세요’ 등 독특한 작전지시 어록으로 인기를 얻은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은 이번 시즌 경기 내내 마이크를 차고 지휘한다. 경기 중 일어나는 작전지시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반응 등 색다른 영상을 팬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프로농구의 재미를 위해 감독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모처럼 코트에 훈풍이 불고 있다. 20일까지 31경기의 누적관중이 10만3,127명(평균관중 3,327명)으로 지난 시즌 같은 기간 대비 22.7% 늘었다. 다행히 LG도 16일 오리온전을 승리하며 연패의 사슬을 끊고 승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자신은 20~30년 전 영광을 지금껏 우려먹으면서 후배들에겐 자질 탓만 하는 이들이 많은 세상이다. 후배들을 위해 내 이름값이라도 써먹으라며 몸을 던지는 선배들이 필요한 때다. 현 감독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이성원 스포츠부장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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