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서울 용산 해방촌 10평 남짓한 규모의 땅에 들어선 한재훈씨의 ‘세컨드 하우스’는 좁은 면적을 극복하기 위해 사선 지붕을 피해 수직으로 높이 끌어올렸다. ©texture on texture

알뜰살뜰 평생 모은 재산으로 집 한 채 마련하는 것이 한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에게는 성공의 척도이자 임무였다.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정작 자신의 여가나 노후 준비는 은퇴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은퇴는 점점 빨라졌다. 집의 부동산 가치는 더 이상 노후의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 베이비부머들은 은퇴 후 ‘삼식이(은퇴하고 집에서 세 끼 먹는 남편)’로 전락하거나, 황혼 육아의 고된 현장에 동원된다.

3년 전 대기업 임원에서 은퇴한 한재훈(63ㆍ고려대 겸임교수)씨는 이 같은 현실에서 탈피해 새로운 노후를 준비했다. 시발점은 지난 2월 서울 용산 해방촌 언덕배기 조그마한 땅(대지면적 35.66㎡)에 지은 3층짜리 ‘세컨드 하우스’다. 아내와 장성한 두 딸이 함께 사는 아파트는 서울 강남 쪽에 따로 있다. “열심히 회사를 다니다가 은퇴하면 어느 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져요. 무기력하고 허탈해지지요. 매일 출퇴근하듯 와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땅값 비싼 도심에 지었지만 대지면적을 최소화해 부담은 줄이고, 도심의 이점은 누린다. 그의 집값(주택 매입 비용)은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9월 기준 4억4,007만원)을 밑돈다.

건축주가 지인들을 초청해 모임을 갖는 1층 식당 겸 주방의 내부는 단출하다. 신발을 신고 카페에 가듯 출입한다. ©texture on texture
◇매일 출근하는 도심 별장

은퇴 후 집 유형은 보통 둘로 나뉜다. 부대끼는 도심에서 벗어나 교외에 전원주택을 짓고 고요한 은둔자가 되거나 직장처럼 도심의 오피스텔을 임대해 연구나 사업 등 개인 활동을 이어 가거나. 제3의 길을 선택한 한씨는 “자연과 함께하는 것은 좋지만 전원주택은 너무 멀어 자주 갈 수도 없고, 관리하는 것도 어렵고, 오피스텔은 매달 이용료를 내고 다니는 독서실같이 압박감이 느껴진다”며 “반면 이곳은 내가 꿈꿨던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매일 눈만 뜨면 이 집으로 나오고 싶다는 그는 출근하듯 매일 이곳에서 책 보고, 글 쓰고, 요리하고, 남산을 산책한다.

은퇴 후 그의 활동 반경은 더 넓어졌다. 집은 그의 활동의 구심점과 같다. “어떤 집을 원하느냐”는 건축가(임태병 전우진 김민주 장우재)의 질문에 그는 해방구, 만찬, 대화, 빗소리, 걷기, 독서, 고독, 몰입, 주방, 사유 등 그가 꿈꾼 집에 대한 단상을 빼곡히 적은 메모 20여장을 건넸다. 건축사무소 문도호제의 임태병 소장은 “상주하는 집이 아니라 개인의 여러 활동이 이뤄지는 공간이라는 데서 일반 주택과 차별성을 띤다”며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손님을 맞는 공적 공간과 서재 중심의 사적 공간을 분리해 건축주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한씨가 집을 짓기로 결심하면서 꿨던 원대한 꿈은 따로 있다. 거칠게 말하면 ‘삼식이’가 아닌 ‘요섹남(요리를 잘하는 섹시한 남성을 일컫는 신조어)’으로의 변신이다. 그는 “은퇴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내 손으로 해주고 싶었다”며 “집으로 초대하면 서로가 불편하니 마땅한 장소가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집으로 초대하자니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고, 오는 이들도 초대한 이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한다고 했다. 그는 건축가에게 식당이 딸린 주방도 꼭 만들어달라고 했다.

사적 공간이 시작되는 2층은 서재다. 건축주는 어떤 방해도 없이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공간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면서 보낸다. ©texture on texture
2층을 제외하고 집의 각 층에는 발코니가 마련돼 있다. 햇빛, 바람, 풍경 등 외부 요인을 집으로 끌어들여 공간에 개방감을 주기 위해서다. ©texture on texture
◇식당, 카페, 서재, 사랑방…무한 활용

그렇게 탄생한 높이 12m의 3층 집은 비탈진 골목길에 반듯하고 정갈하게 들어섰다. 1층 주방 겸 식당은 집의 입구에서 1m가량 낮게 시작된다. 건물을 최대한 아래로 내려 위로 높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한씨의 요구대로 1층은 각종 모임과 회의, 수업, 토론 등이 진행되는 공적 공간이다.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게 바닥은 돌을 깔고, 출입구에 별도의 단을 내지 않았다. 임 소장은 “집이지만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어 마치 식당이나 카페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고 말했다. 한씨는 지난 3월부터 매주 최소 2번 이상 지인을 초대해 만찬을 열었다. 한 번에 많게는 10여명이 오기도 했다. 최근까지 140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1층에서 외부 계단을 올라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2층부터 3층, 다락은 사적 공간이다. 2층은 서재 겸 연구실로 한씨가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곳이다. 그는 “집에도 서재가 있지만 아무래도 TV를 보게 되거나, 가족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온전히 나만의 공간으로 보기 어렵다”며 “이곳에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원하는 책을 마음껏 꺼내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3m의 긴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긴 창을 냈다. 시선 분산은 막되 채광은 확보한다. 3층과 다락은 편히 쉬면서 남산과 시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휴식 겸 사색 공간이다.

내부는 작고 단출하다. 좁고 답답해 보이지 않게 하는 게 건축가의 난제였다. 집에서 가장 넓지만 19.5㎡(5.9평)에 불과한 1층은 여러 명이 들어가도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40㎝로 한 번 더 단을 낮춰 층고(2m50㎝)를 최대한 높이 끌어올렸다. 3층과 다락으로 이어지는 보이드(Voidㆍ오픈 천장)로 4m에 가까운 층고를 확보한 것도 작은 집을 좁지 않게 느껴지도록 한다.

도심의 작은 집들이 사선으로 바닥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 반해 건축가는 천장이 기울어지는 사선을 최대한 피해서 설계했다. 임 소장은 “벽체나 지붕이 기울어지면 작은 집이 옹색해질 수 있다”며 “최대한 사선을 피하되 발코니를 내어 외부와의 접촉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2층을 제외하고 모든 층에 발코니가 있다.

평균 층고가 1m50㎝인 다락은 다다미를 깔고 원목 등판을 마련해 편안하게 앉아서 사색할 수 있도록 꾸몄다. ©texture on texture

한씨는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이지만 단조롭지 않고 위치에 따라 굉장히 재미있게 활용이 가능하다”며 “여기다 집을 지으면 다들 면적과 비용을 따지지만, 그런 것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계단에 걸터앉아 풍경을 감상하고, 다다미가 깔린 다락에서 낮잠을 청한다. 책을 들고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원하는 곳에 앉아 읽고, 음악을 틀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긴다. 도보 10분 거리인 남산 산책도 크나큰 즐거움이다.

풍요로운 노후만큼이나 집의 활용도도 무궁무진하다. 임 소장은 “처음에는 가족, 지인들이 즐기는 공간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집을 짓고 건축주가 모임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수업, 회의, 만찬 등을 하는 걸 보고 동네 사랑방 같은 역할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향후 새로운 주거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내달 이웃 주민과 함께 꽃꽂이 수업도 연다. 18일 건축물 개방 축제인 ‘오픈하우스서울 2019’ 행사에 참여해 한씨의 집을 둘러본 40대 주부 김모씨는 “은퇴 후에 도심의 아주 작은 공간에서 즐겁게 노후를 보내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 나이 드는 게 그리 서글프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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