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구절초

하루가 다르게 가을이 깊어갑니다. 설악산의 단풍 소식이 벌써 들리네요. 제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의 나무들은 계수나무, 노란 단풍을 시작으로 점점이 한두 그루씩 물들어가기 시작하였으니 한 주쯤 지나야 제대로 단풍빛깔이 들것 같습니다. 지금 한참 마음을 흔드는 것은 유난히 풍성하고 향기로운 가을꽃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국화과 식물들이죠.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이름, 들국화는 막상 식물도감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산과 들에 피어나는 국화과(科)에 속한 식물들을 그리 부릅니다. 수목원의 여러 정원과 보전원 그리고 이어지는 광릉숲가엔 이 땅 곳곳에서 옮겨와 안전하게 터를 잡은 여러 구절초와 쑥부쟁이 식구들을 비롯하여 마지막에 피어나는 산국까지 가지가지 들국화들이 흐드러져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때론 억새 무리와 때론 꽃향유와 같은 보랏빛 꽃들과도 어우러져 기품있는 가을빛을 더해갑니다.

산국

이 가을의 꽃들은 어떻게 꽃이 필 때가 되었음을 알았을까요? 일반적으로 꽃의 개화는 밤낮의 길이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코스모스, 국화와 같이 늦여름에서 가을에 피는 꽃들을 흔히 단일식물(短日植物)이라 하는데 낮의 길이가 짧아져서라기보다는 지속적인 밤시간이 주어지면 때가 되었음을 인지하고 꽃이 피는 식물들이죠. 물론 장일식물 즉 그 반대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주로 봄꽃들도 있고, 때론 장미나 옥수수처럼 빛의 주기보다는 온도 등과 같이 다른 조건에 좌우되는 중일 식물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식물들마다 갖는 이러한 특성들을 연구하여 개화 시기를 조절하여 사시사철 꽃을 피워 꽃시장에 출하하기도 하지요.

쑥부쟁이류

개화뿐 아니라 식물에는 생체시계(生體時計, biological clock)가 있어서 하루를 주기로 나타나는 여러 생명현상을 관장한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여 년 전 프랑스의 천문학자가 미모사가 빛이 없어도 잎을 펼쳐내는지를 실험하여 24시간을 주기로 생리활성을 조절하여 만드는 리듬을 관장하는 생체시계를 이야기한 이후 최근까지 이에 관여하는 유전자들과 그 기작을 밝혀내는 연구가 이어지고 노벨상이 수여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 생체 시계 핵심 유전자인 라이(LHY)를 조절해 식물의 성장, 개화촉진 등 발달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 ‘자이겐티아(Gigantea)’라는 단백질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식물 아니 생물들은 생체시계를 조절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가며 효율적인 생을 살아가지요.

때가 되어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들에게도 스스로 새로이 시작할 시간, 머물러야 할 시간과 떠나야 할 시간을 제대로 인지하는 인생의 시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때가 되었음에도 머뭇거리거나 준비하지 않아 시작을 놓치기도 하고, 떠나야 할 시간임에도 미련의 끝을 잡고 머뭇거리다가 누추해지기도 하며, 좀 더 머물러 갈무리해야 하는 책임을 피해버리기도 합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인생의 적절한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인생의 시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심 혹은 게으름 같은 장애물로 고장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계가 더 망가지기 전에 훌훌 짧은 가을 여행이라도 떠나보면 수리가 될까 싶어 궁리 중입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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