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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자르(Saar)의 “독립 반대” 투표(10.23)

입력
2019.10.2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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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국경 자를란트의 청소년들(히틀러 유겐트). 자르는 1차대전 후 15년, 2차대전 후 9년간 사실상 프랑스의 볼모였다. keywordbasket.com
2차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국경 자를란트의 청소년들(히틀러 유겐트). 자르는 1차대전 후 15년, 2차대전 후 9년간 사실상 프랑스의 볼모였다. keywordbasket.com

프랑스와 룩셈부르크 국경의 독일 자를란트(Saarland)주는 3개 도시와 주(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를 빼면 16개 연방주 가운데 가장 면적이 작다. 2017년 현재 인구는 약 99만명. 자르(Saar) 주민들은 20세기 독일이 저지른 두 차례 세계대전의 패전 책임을 가장 오랫동안, 사실상 피식민의 신분으로 짊어져야 했다. 1차 대전 후엔 국제연맹 자치령으로, 2차 대전 후에는 프랑스 보호령으로, 원치 않는 국기(國旗)와 독자적인 국가 문장을 가져야 했다. 지기도 했다. 자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르 지역과 함께 서유럽 석탄ㆍ철강의 주요 산지이자 공업지대다.

1차 대전 패전국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자르 분지 지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지역으로 내놔야 했다. 연맹이 임명한 5인 통치위원회는 프랑스인과 자르 출신 비독일인, 제3국인 3명으로 구성됐지만, 실질적 통치는 프랑스 군정에 의해 이뤄졌다. 전쟁 피해 보상 차원의 위임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공장과 탄광을 장악했고, 프랑스 통화ㆍ관세 블록 안에 포섭했다. 자르는 국제조약에 따른 15년 한시 프랑스 식민지였다. 자르 주민들은 당연히 그 조치를 못마땅해했다. 35년 1월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자치국가 지위를 지닌 사실상의 프랑스 식민지로 남을지, 독일로 재편입할지 묻는 그 투표에서 주민 90.73%가 독일 편입을 원했다. 현상 유지는 8.87%, 프랑스와의 통일을 원하는 이는 0.4%였다.

2차대전 패전 후 자르는 다시 프랑스 보호령으로 편입됐다. 냉전이 시작되고 분단된 독일이 냉전의 전초기지가 되면서 2차대전 배상 문제는 사실상 유야무야됐지만, 자르 지역에 관한 한 프랑스는 독일 재편입에 극렬히 반발했다. 그 결과가 47년 12월부터 56년 말까지 약 9년간의 보호령 체제였다. 프랑스는 서유럽연합 지원하에 자르를 프랑스와 경제적으로 통합된 독립국가로 재편하려 했다. 지속 여부에 대한 의사를 묻는 새로운 주민투표가 1955년 10월 23일 치러졌다. 찬성 32.3%, 반대 67.7%. 자르의 주민들은 또다시 독일(당시 서독)이고자 했다. 프랑스는 나흘 뒤 서독과 자르 조약을 체결, 이듬해 1월 1일 자르를 서독에 반환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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