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클레오파트라가 진주를 빠트린 마레오틱 와인

입력
2019.10.23 04:40
25면
0 0

※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 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브리태니커 사전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브리태니커 사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이다. 그는 ‘절세미인’이라는 미명에 가려졌지만, 실은 당대를 뒤흔든 야심가였다. 안타깝게도 그가 이어받은 왕국은 그야말로 폭풍 속의 돛단배와 같았다. 그는 로마의 실력자 카이사르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도움도 얻고 사랑도 얻었지만,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일당에 의해 암살당하자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에서 와인을 마시며 시름을 달래던 어느 날, 로마의 2인자인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안토니우스는 계속된 전쟁에 지친 데다 군자금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또다시 클레오파트라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 선상 파티를 준비했다.

드디어 파티가 시작됐다. 안토니우스는 파티를 즐기면서도 부족한 군자금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클레오파트라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더욱 부티 나는 놀라운 이벤트를 벌인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한쪽 귀에서 빼낸 진주 귀걸이를 잔에 담긴 와인 속에 빠뜨렸다.

진주 한 알 정도야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그 진주는 클레오파트라 집안의 가보로, 그 옛날 키프로스 섬 근처 바다에서 아프로디테가 탄생할 때 귀에 걸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이 지녔던 보석이었으니, 그 가치가 어떠했겠는가.

와인잔에 진주를 빠뜨리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잔 속의 와인은 마레오틱 와인으로 추정된다. 위키아트
와인잔에 진주를 빠뜨리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잔 속의 와인은 마레오틱 와인으로 추정된다. 위키아트

와인 속에 빠진 진주 귀걸이는 와인 방울을 튀기고 가라앉더니 이내 기포를 일으키며 녹기 시작했다. 마치 아프로디테가 탄생하던 순간 조개 속에 자태를 드러내기 직전,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남근을 바닷물에 던지자 물방울이 퍼지고 기포가 일었듯 말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와인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안토니우스의 심정이 어땠을까. 여기서 그칠 클레오파트라가 아니었다. 그는 와인잔을 다시 채우고는 나머지 한쪽 귀걸이에도 손을 댔다. 그 순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그날 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와인을 마시며 사랑을 나누고 운명공동체가 된다.

이쯤 되면 분위기 깨는 말이 필요한 법. 그날의 그 와인은 어떤 것이었을까. 와인이 아니라 식초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 생산되던 마레오틱 와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마레오틱은 이집트는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최고급 와인으로 칭송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마레오틱을 특히 즐겨 마셨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마레오틱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아파시멘토 방식으로 만든 스위트와인인 파시토(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와인과 지역 별칭인 레치오토, 빈산토, 뱅 드 파이으의 라벨들.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아파시멘토 방식으로 만든 스위트와인인 파시토(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와인과 지역 별칭인 레치오토, 빈산토, 뱅 드 파이으의 라벨들.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그 시절의 최고급 와인은 마레오틱, 타이니오틱, 세베니스 등 이집트산 와인과 로마의 팔레르눔에서 생산된 오피미안 와인, 타소스, 레스보스, 키오스 등 그리스령 섬에서 생산한 와인이 대표적이다. 모두 마레오틱 같은 달콤하고 알콜도수가 높은 화이트 와인이다.

이들 와인은 발효 전에 포도를 건조하여 당도를 높였고, 때로는 단맛을 더 강화하기 위해 끓인 포도즙과 꿀을 넣어 만들었다. 심지어는 납으로 된 용기에 담아 포도즙을 끓이거나, 납을 직접 넣기까지도 했다. 납은 단맛을 더 끌어올렸고 방부제 역할도 했다고 한다.

당시 아테나이오스라는 평론가는 “뛰어난 화이트와인으로 향기롭고 쉽게 흡수되며 마셔도 어지럽지 않고 이뇨 효과가 있다”고 마레오틱을 표현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마레오틱 와인 등 당시의 최고급 와인의 맛을 알 수는 없다. 포도품종도 다를뿐더러 양조법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짚방석 위에서 포도를 건조하는 모습. 아파시멘토는 포도를 건조하는 기법(Appassimento method), 공정(Appassimento process)을 의미하고, 아파시멘토한 포도(Passito grape) 또는 그 포도로 만든 스위트와인을 이탈리아에서는 파시토(Passito wine)라고 부른다(아마로네와 같은 드라이버전도 있다). 짚을 뜻하는 스트로와인(Straw wine)이라고도 한다. dissapore 홈페이지 캡처
짚방석 위에서 포도를 건조하는 모습. 아파시멘토는 포도를 건조하는 기법(Appassimento method), 공정(Appassimento process)을 의미하고, 아파시멘토한 포도(Passito grape) 또는 그 포도로 만든 스위트와인을 이탈리아에서는 파시토(Passito wine)라고 부른다(아마로네와 같은 드라이버전도 있다). 짚을 뜻하는 스트로와인(Straw wine)이라고도 한다. dissapore 홈페이지 캡처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포도를 그늘에서 수 주 동안 건조해 당도를 높여 와인을 만든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이 방식을 아파시멘토 방식이라 하여 와인을 만들고 있으며, 이렇게 만든 스위트 와인을 파시토라고 한다. 베네토 지방의 레치오토, 토스카나 지방의 빈산토, 프랑스 쥐라 지방의 뱅 드 파이으도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스위트 와인이다.

그런데 진주가 와인에 어떻게 녹느냐고? 그건 불투명한 와인잔에 진주귀걸이를 빠뜨린 클레오파트라만 아는 비밀이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어드바이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