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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취임사 일독을 권한다

입력
2019.10.22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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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017년 7월 청와대 공식 페이스북에 게재된 휴가지에서 독서하는 모습의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제공
2017년 7월 청와대 공식 페이스북에 게재된 휴가지에서 독서하는 모습의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제공

고백하건대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진 못한다. 책을 많이 사는 편이나 독서록을 작성하거나 주요 내용이 적힌 부분에 메모지를 붙여놓진 않는다. 암기해 시험을 치르는 교과서가 아닌 한 한번 완독한 책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좋은 말과 글을 따로 옮겨 놓고 자주 읽고 인용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게으른 나로서는 좋은 글과 말이 주는 감동만으로 만족해 왔다.

이런 내가 꼽는 최고의 글 중 하나는 학창시절 유명 영어 학습서에서 알게 된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그 유명한 연설문이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명문이지만 특히 나에겐 “언젠가는 나의 어린 네 자녀가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인격으로 평가 받는 그런 나라에 살 것이라는 꿈입니다(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는 부분은 잊히질 않는다. 노예가 해방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차별 받고 있던 흑인들에게 희망이자 꿈이 됐던 명문이자, 전 세계에 자유와 평등, 인권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임을 알렸던 연설이다. 더욱이 부모로서 지금의 혹독한 현실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성애까지 담겨 있지 않은가. 이른바 ‘조국 사태’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불공정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한 아이의 아비로서 이 글이 새삼 떠올랐다.

그렇다고 1963년의 ‘워싱턴 평화행진 연설’을 읽어 보실 것을 권하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킹 목사 연설에 버금가는 감동과 희망을 줬던 연설문이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들여다볼 때마다 감탄했던,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너무나 안타까운 글. 바로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다. 불과 2년여 전 많은 국민들을 열광시켰던 연설 아니었는가.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는 말에 녹아 들었다.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습니다”는 부분에서는 바로 직전 정부와 오버랩 됐고, 이어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다”는 부분에선 ‘언젠가 광화문 인근을 지나다 우연히 볼 수도 있겠다’는 친근함도 와 닿았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겠다”고 한 뒤 ‘베이징 혼밥 논란’ 땐 안타까웠지만, 이후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냈을 때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 같아 신뢰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또박또박 읽는 문장 하나하나에 찬사가 쏟아졌지만, 이제는 비수가 돼 본인은 물론 국민의 가슴에 꽂힌 글.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화가 치미는 문장이다.

2년 반 남았다. ‘조국 사태’로 꽉 막힌 정국을 전환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문 대통령이 직접 민생경제를 챙기겠다고 나섰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계기와 다짐이 필요하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다. 보수ㆍ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한다”,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서 일을 맡기겠다” 등이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킹 목사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가 공휴일(1월 셋째 주 월요일)이 있는 유일한 미국인으로 국가의 자랑이다. 거기까지 바라진 않는다. 지금은 “국민의 자랑으로 남겠다”는 것도 위태로워 보인다. 취임사를 다시 꺼내보시길 권한다.

이대혁 경제부 차장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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