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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갑질’ 시달리는 승선근무예비역 “배 위는 여전히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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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갑질’ 시달리는 승선근무예비역 “배 위는 여전히 지옥”

입력
2019.10.21 04:40
수정
2019.10.21 13:3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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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에 2차 가해 피해자 신고…해경 수사 중

승선근무예비역들은 병역을 대신하기 위해 오른 배를 '바다 위 지옥'이라고 불렀다. 폭언과 갑질에도 이들은 병역 문제가 걸려있어 쉽게 내리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승선근무예비역들은 병역을 대신하기 위해 오른 배를 '바다 위 지옥'이라고 불렀다. 폭언과 갑질에도 이들은 병역 문제가 걸려있어 쉽게 내리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배에서 내려 군대를 가든가 알아서 해.”

병역을 대체하는 ‘승선근무예비역’ 신분으로 한 해운업체 외항선을 탔던 A(25)씨는 3개월 동안 이런 협박성 말을 견디다 지난 9월 결국 배에서 내렸다. 귀국을 3개월 앞든 시점이다.

A씨에게 3등 기관사로 일한 3개월은 ‘바다 위 감옥’과 다르지 않았다. 일상이 된 초과근무나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강요는 그나마 버틸 만했다. 20여 명의 선원 중 나이도, 직급도 제일 막내인 그에게 가장 괴로웠던 건 기관장의 괴롭힘이었다. 기관장은 술을 마실 때마다 몸을 만지고 귀를 깨물었다. A씨 방이나 엘리베이터 등 장소를 불문하고 성희롱 발언과 폭언을 일삼았다. A씨는 기관장이 방에 들어올까 두려워 매일 밤 생수통을 문 앞에 쌓아둬야 했다.

회사는 “둘이 해결하라”고 했다. A씨가 화해를 거부하자 회사는 이집트에서 기관장과 함께 하선시킨 뒤 돌아오게 했다. 귀국 내내 A씨는 기관장과 비행기와 자동차를 타야 했다.

해양대 4년을 마치고 승선근무예비역으로 일한 1년이 아까워 참았던 A씨는 결국 지난달 27일 인천해양경찰서에 강제추행과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기관장을 고소했다. 이 사건은 현재 경남 창원해양경찰서가 사건을 넘겨받아 수사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의 군인권센터를 찾아 상담을 한 A씨는 “이제 다 내려놓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를 상담한 김숙경 군인권센터 성폭력상담소 단장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폐쇄적인 구조가 결합돼 있던 상황에서 2차가해 까지 가해졌다"고 지적했다.

승선근무예비역 선상 괴롭힘 제보자가 지난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승선근무예비역 선상 괴롭힘 제보자가 지난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지난해 3월 고(故) 구민회씨가 ‘괴롭힘을 참기 힘들다’는 유서를 남기고 배 위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자 정부는 각종 대책을 내놓았지만 1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승선근무예비역들은 여전히 병역 의무를 볼모 삼아 벌어지는 ‘갑질’을 호소한다. “차라리 군대를 가겠다”며 중도 포기하는 젊은이들도 속출하고 있다.

20일 병무청과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2008년 시작된 승선근무예비역은 해기사(항해사ㆍ기관사) 면허 소지자를 군 복무 대신 배에 태워 해운업체에서 근무하게 하는 대체복무제도다. 5년 이내에 36개월간 승선하면 군 복무가 대체된다.

지난해 구민회씨 사망이 이슈가 되자 병무청과 해수부는 △연2회 모바일 인권침해 여부 전수조사 △선원근로감독관에게 조사 의뢰 △긴급구제 필요 시 해운업체 공조 등 각종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승선근무예비역들은 병무청이 지난해 5월부터 실시하겠다고 한 ‘인권침해 여부 전수조사’가 1년에 2회 전체 승선근무예비역들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 ‘인권침해 등 사항이 있으면 전화나 문자로 신고해달라’고 안내한 것이 전부라고 지적한다. 이마저 문자나 전화를 하려면 선장이 상주하는 브릿지(선교)에서 통신망을 이용해야 하니 사장 옆에서 사장에 대한 신고를 해야 하는 셈이다. 지난해 이런 식으로 병무청에 접수된 제보는 달랑 1건이었다.

병무청이 승선근무예비역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힌 '인권침해 여부 전수조사' 카카오톡 안내 화면. 적혀있는 대로 문자, 통화를 통해 신고를 하려면 책임자가 있는 브릿지(선교)로 가야만 해 사실상 제보는 불가능하다. 독자 제공
병무청이 승선근무예비역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힌 '인권침해 여부 전수조사' 카카오톡 안내 화면. 적혀있는 대로 문자, 통화를 통해 신고를 하려면 책임자가 있는 브릿지(선교)로 가야만 해 사실상 제보는 불가능하다. 독자 제공
병무청이 승선근무예비역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힌 '인권침해 여부 전수조사' 카카오톡 안내 화면. 적혀있는 대로 문자, 통화를 통해 신고를 하려면 책임자가 있는 브릿지(선교)로 가야만 해 사실상 제보는 불가능하다. 독자 제공
병무청이 승선근무예비역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힌 '인권침해 여부 전수조사' 카카오톡 안내 화면. 적혀있는 대로 문자, 통화를 통해 신고를 하려면 책임자가 있는 브릿지(선교)로 가야만 해 사실상 제보는 불가능하다. 독자 제공

해수부 선원근로감독관에게 조사를 의뢰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기는 마찬가지다. 선원근로감독관에게 진정을 요청한 건 2017년 0건, 지난해 1건, 올해 3건에 그쳤다. 익명 보장도, 증언을 받아내기도 어려운 탓이다. 55명의 선원근로감독관이 내국인 3만5,000명을 포함해 6만여명을 담당하는 상황에서 승선근무예비역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자체가 어려운 형편이다.

스스로 포기하고 병역을 택하는 인원은 증가 추세다. 2015년 31명이었던 중도 포기자는 2016년 31명, 2017년 42명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70명이나 됐다. 승선근무예비역을 그만두면 근무한 기간의 25%만 인정받고 군에 재입대해야 한다.

[저작권 한국일보]승선근무예비역 포기 인원. 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승선근무예비역 포기 인원. 신동준 기자

중도 포기를 하지 않는 해기사들도 승선근무예비역을 하는 동안만 견디다 복무기간이 끝나면 업계를 떠나기 일쑤다. 한 번 바다로 나가면 수개월간 육지로 돌아오지 않는 근무 환경상 병역기간이 끝났는데도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는 갑질도 종종 발생한다. 승선근무예비역 출신 B(28)씨도 병역 근무기간이 한 달이나 지났지만 하선할 수 없어 결국 병무청에 병역기간 확인 요청을 했다.

B씨는 “계속 배를 타는 길을 택했더라면 절대 그렇게 요구 못했을 것“이라며 “아깝긴 하지만 다시 그 생활을 하고 싶진 않다”고 설명했다 해양대 4년, 승선근무예비역 3년 총 7년을 기관사로 일했던 그는 전역 후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해운업계는 노동력 부족을 이유로 ‘인원 유지’를 주장한다. 승선근무예비역 제도가 폐지되면 해운업과 연관산업을 지탱하는 해기사 수급이 단절된다는 이유에서다. 해양대에게도 승선근무예비역은 가장 중요한 홍보 수단이다. 한국해양대 관계자는 “승선근무예비역을 보고 입학하는 학생들이 거의 대다수”라며 “승선근무예비역 자체가 회사에 취업하는 것으로 집계되기에 높은 취업률(약80%)과도 연동돼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그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환경 개선에는 노력하지 않는다는 게 승선근무예비역들의 하소연이다. 한국선주협회는 “지난 5월 선내 인권교육 자료를 만들어 회사에 배포했다”고 하지만 다수의 승선근무예비역들은 “교육을 받은 적도, 자료를 본 적도 없다”고 한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승선근무예비역의 열악한 근무여건과 현역보다 10배나 높은 사망, 부상률 등을 지적했지만 실질적인 개선이 없다”며 "인명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업체엔 인원을 배치하지 않는 ‘원아웃제'를 즉각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구민회씨 사건을 맡아 승선근무예비역들의 제보를 받고 있는 정소연 법률사무소 보다 변호사는 “해양대 4년간 의무적인 기숙생활, 선박이란 폐쇄적인 공간 탓에 제보가 중간에 끊기는 경우가 많다”며 “신고를 못해도 인권침해를 잡아낼 수 있는 공적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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